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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가 쓴 <나의 과거>
관리자 2007-05-09
*이 글은 1949년 출판된 단행본 <혈맥>(영인서관 출판) 부록으로
 작가 김영수가 직접  쓴것이다.  
 이 글의 어휘나 맞춤법은 당시의 것으로서 필자가 쓴대로 옮긴다.
 한자 단어는 되도록 한글화 하였고 불가피한것은 한자대로 두었다.<관리자>
 
나의 과거(過去)
 
소설 <소복(素服)>을 쓴 것은 早大(주: 동경 와세다 대학)를 나오던 해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열두해 전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작품이 활자가 되고  나의 이름 석자가 문단의 말석 명부에 오르게 된 것은, 생각하면 어언 十여년이 된다. 이 十여년 동안을 나는 무엇을 해왔나 하는 그지없이 고독한 생각이 세삼스럽게 든다.
'十 몇해 동안을 무엇을 해왔던가---?' 하는 고적한 독백서 부터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 안할 수 없다.
소설 <소복>이 나로 하여금 문단으로 나서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던만큼, 늘 이 작품을 생각할때 여러가지 그리운 기억이 많다. 이야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이 무어라고 떠들든 나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이 작품을 애끼고 사랑한다.
이것은 물론 나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생활을 비롯하여 준 전시대의 유물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한 기념품 애호적인 센티멘탈리즘에서만도 아니다.
작품 <소복>은 가치 평가는 고사하고 나에게 인생의 방향을 계시하여 준, 원망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란서의 위대한 모랄리스트 듀아데르는 자기는 소년시대에서부터 청년시대까지 빈곤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감격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한 소리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편의 감격적인 작품은 불행히도 못 쓰고 있지만, 나는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빈궁에 부닥뜨렸고 가난과 빈곤은 차차 자라면서 더 했다.
배재고보(培材高普)를 들어가게 된 것은 생각하면 순전히 나의 만용이었다.
두부, 콩나물, 명태, 파, 시금치, 이런한 것들을 자판에다 벌려놓은 소위 구멍가게 집 아들인 나로서는 여니 상업학교나 목공학교도 아니고 중학을 들어가게 된 것은 정말이지 엉뚱한 생각이었다. 들어가면서부터 제 때에 한번 월사금을 내어 보지 못한 나는 간신히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진급이 되자, 제1학기 수업료 미납자인 나는 제적을 당했다. 강당 붉은 벽돌 벽에는 나의 이름이 내붙고, 동무들은 그 앞에 몰켜서서 수근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확확 달아 올라, 양복 윗저고리 속에다 책보를 감추어 들고서 교실 뒤로 돌아 도망질을 치듯 교문을 빠져 나왔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어머니 앞에 엎드리어 얼마를 느껴 울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써 가다가는 얼마를 써야 될지 모르니까 인제부터 이야기의 템포를 날릴 수 밖에 없다.)
그 때부터 꼬박 세해 동안을 나는 가게에 나가 두부를 팔고 콩나물을 팔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돈 안들이고 공부를 할 수 없을까 하고, 그야말로 틈만 있으면 이 생각이었다.
중동(中東)학교 예과 2년에 보결시험을 보아서 들어 간 것은 전혀 나의 이러한 작전계획에서였다.
최우등으로 졸업을 하면 교비로써 대학을 보내준다는 소문을 들은 나는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과연 나는 평균 96점이란 성적으로 예과 2년 2학기에서 본과 2년으로 넘어갔고, 작전계획대로 우등으로 졸업을 하였고, 또 역시 작전계획대로 동경으로 가게 되었고, 또 소원대로 조도전(早稻田)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매달 30원(圓)씩 모교에서 학비가 왔다.
이중에서 방세와 밥값과 이발료와 목욕료와 기타 잡비로 25원을 떼어내고, 남어지 5원으로 학비를 쓰고 책을 사고 연극을 구경하러 다녔다.
(자꾸 얘기가 길어진다. 나는 더 템포를 재쳐야겠다.)
早大 영문학과를 택한 것은 장차 영어교원이 되려는, 이 역시 계획적인 의도였다.
그러나 동경의 찬란한 문화는 나를 문학으로 연극으로 피로하게도 안내해 주었고 경이의 눈을 감지 못하게 하여 주었다.
서울서 30원이 오면, 우편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新宿(주: 신주쿠)으로 들고 나가 紀之國屋(주: 기노쿠니야)서점에 가서 닥치는 대로 신간서적을 샀다.
책을 피면 싱싱하게도 코를 찌르는 잉크냄새. 나는 그 잉크 냄새가 어찌도 좋았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틀 사흘씩 나는 밤을 새워가며 신간을 읽었다.
그 때문에 식권을 못 사서 며칠씩 밥을 못 먹고, 방에서 이불을 쓰고 딩굴고 있던 일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도 환히 눈 앞에 떠 오른다.
그러면 곧잘 동무들이 놀러 왔다가는 벽에 걸린 내 옷가지며 책장에 꼽혀있는 책을 들고 나가, 전당포에 가 잡혀다가는 고구마도 사오고 '다이후꾸'도 사다주고 하였다.
그 때 이러한 친절을 내 일 같이 해 준 친구는 지금 우리 극단의 소중한 연기자인
박학(朴學)군과 이화삼(李化三)군이었다.
사흘이나 고스라니 굶고 물만 마시고 있다가, 학이나 화삼이가 사다주는 고구마를 먹고 기운을 채리던 것도 나의 동경 학창시대에 있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리운 기억의 하나다.
이러한 데카당한 생활은 학부로 올라가면서 더 했고, 1학년 때보다 2힉년 때가, 2학년 때보다 3학년 때가 더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고 싶은 책은 더 많았고 읽고 싶은 책이 엄청나게도 많은데, 서울서 오는 一金 30圓也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생활의 곤궁은 문학에서만 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築地(주: 쓰키지) 소극장에서 하프트만의 <직장(織匠)>이라는 연극을 하는 초일에 보러 갔다가 어찌도 감격했던지 돌아오는 길에 15일간 표를 한꺼번에 산 적이 있다. 그 때문에 그 달에는 한달 내내 점심을 먹지 못했고, 방 세도 못 치러서 주인 '오바상'(주:아주머니)에게 살이 직직 내리도록 시달리었다.
축지 소극장에서의 나의 공부는 컸다. 사실 나에게는 대학이란 너무도 상업적이요 소비적인 뿌르죠아의 기관에 지내지 않았다.
애란(愛蘭: 아일랜드)극을 강의하는 日高라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나와서 가르친다는 것이 그레고리 부인과 씽그의 약력을 소개해주고 저작년대표를 칠판에 써 주는 것 밖에 없었다. 희곡전집 뒤에 붙은 작자 소개문을 그대로 외우고만 나갔다.
내 딴에는 그 때 상당히 연극열에 뛰어 책권이라도 읽었노라고 자처하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교수방법에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나는 "그 따위로 교수하려거든 집어치우시요" 하고, 日高교수에게 항의를 하였다. 물론 그같은 나의 항의가 통할 리가 없었다.
학부 3학년 졸업반에서 日高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과목은 애란극과 亞米利加(주: 아메리카) 문학의 두가지였다. 이것은 모두 필수과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엉터리 교수 앞에 가선 단 한 시간도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웠다. 그후부터는 나의 시간표에서는 日高 교수 시간은 모조리 지워버려졌고 물론 시간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미주의(唯美主義) 연구로 '월터 페-터-'論을 써서 졸업눈문에 '優'를 받았으나, 日高교수의 필수과목 두 가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졸업을 하고 말았다.
이 때, 나와 같이 한반에 있던 유일의 조선 학생으로서는 후에 나와서 동양극장에서 연출을 보던 한유동(韓柔東)군이 있다.
졸업논문에 '優'를 받고, 그러나 졸업장이 없이 고향으로 돌아 온 나는 집에 부모에게나 모교 최규동(崔奎東)선생에게나 한동안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일생을 문학하는데 받치겠다 결심한 나는 졸업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장차 문학을 하려는 나로서 얼마마한 가능이 있느냐 하는 것을 나 스스로 시험해 보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하기에 밥 먹기 보다도 열중하였다.
가능(可能)의 발견-------, 이것은 앞으로의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그야말로 중대한 노력이었다. 창작에의 死鬪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무작정 방 속에 처박혀 소설을 쓰고 희곡을 썼다.
그러나 어디 누구인지도 모르는 무명작가의 작품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실어 줄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자 나는 기회를 붙잡았다.
그 해 겨울, 조선일보에는 신춘문예 모집의 社告가 낫고 그것을 보자 나의 가슴은 뛰었다. 그 날부터 나는 방 문을 첩첩이 닫고, 아내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조그만 책상을 앞에 놓고 원고지를 펼처 놓았다.
아내는 두살 난 큰 딸 나미(奈美)를 안고, 내 방 근처에는 얼씬도 안하면서 밖으로만 돌며 격려를 하였다.
덛문까지 첩첩이 닫고서도 그래도 마음이 뒤설레어 나는 또 방 안에다 병풍을 동그랗게 둘렀다. 그러니까 책상하고 나하고 두개의 물체가 겨우 들어갈만큼 병풍을 둘러, 방안에 또 방을 만든 셈이었다.
이러한 방안의 방 속에서 절대 불가피한 일 이외에는 나는 방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 병풍 속에서 나는 꼬박 보름이나 살았다. 병풍 속에서 보름이나 끙끙거리며 원고지 二百枚를 다 없애고, 마즈막 얻은 것이 五十枚가 조곰 넘는 단편소설 <용녀(龍女)였다.
<용녀>가 떨어지자 나는 날을 듯이 기뻤다. 나는 <용녀>를 신문사로 보내기 전에 우선 문학하는 친구를 찾았다. 다방으로 나아가 이서향(李曙鄕) 김진수(金鎭壽) 두 친구를 불렀다.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나는 단숨에 <용녀>를 읽었다. 그리고 비평을 기대렸다. 서향도 진수도 유망하니 빨리 신문사에 갖다 주라고 장려해 주었다. 나는 그 길로 조신일보사로 뛰어 갔다. 그 날이 바루 막음 날인 12월 15일이었다. 수부에 가서 원고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 온 나는 그 날부터 마음도 몸도 초조하여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딱해 보였다.
서향이나 진수는 1등당선은 틀림 없으니 미리 한 턱 내라는 소리까지 하여 나를 만나기만 하면 위로해 주었으나, 내 생각에는 그것이 모두 그저 위로 해주는 말이거니 생각되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 못지 않게 대단한 근심이었다.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하고 안타까운 속에서 나는 반 달을 살았다. 원고를 보내놓고 생각하니 자꾸 하나 둘씩 흠집이 생각 나고 미흡한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이나 모래나 심사결과가 발표되게 되었으니 어쩌는 수 없이 인제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루는 외출했다가 돌아 오니까, 아내가 내다르며 신문사에서 편지가 왔다고 하였다. 봉투를 뜯는 손이 어찌면 그렇게도 떨리든지---.
一等當選---. <용녀>가 1등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제한된 매수가 벌써 다 넘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그쳐야겠다.)
그 날로 나는 신문사에 가서 학예부장 김기림(金起林)씨를 만났다. 김기림씨는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제목을 <소복>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나는 쾌히 이에 응하였다.
<소복>---. 내가 작가로서의 출발을 하게 된 스타아트 마아크 <소복>은 이렇게 해서 비로서 활자화되었다.
상금 일금 一百圓也를 타서 떠스터에프스키 전집을 사고, 커다란 책상을 하나 샀다.
그리고는 오래간만에 쌀을 한가마 들여오고, 몇몇 친구들을 불러 질탕히 마시고 떠들고 하였다.
나는 지금 이 글을 그 때 상금을 타서 산 책상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때 두 살이었던 나미는 어느듯 열두살이 되었고, 몇달 있으면 소학교 5년생이 된다.
                                                                                         金 永 壽
 
 
 
 
 
人生은 드라마 貞洞에서 汝矣島까지
1940년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 김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