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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은 드라마 貞洞에서 汝矣島까지
관리자 2007-03-12
<유호씨의 비화연재 - 1990. 10.1 방송작가 협회보 게재>
放送作家들의 감춰둔 이야기(5)
人生은 드라마
貞洞에서 汝矣島까지

兪 湖
무지무지한 筆力의 金永壽
시나리오 한편을 하룻밤에
 
38년 중학교 4학년때, 나는 惡友들이 한번 도전해 보라는 바람에 참으로 무모하게도 朝鮮日報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에 응모를 한 일이 있었다. 당선자에겐 미리 통보를 해준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신문을 받아보니까 당선작은 ‘素服’ 金永壽로 되어 있었다. 작가의 약력은 일본의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에 柳韓洋行 학술부 근무.
金永壽란 석자는 그날부터 내 뇌리에 박혔다.
46년 10월 정동 중앙방송국엘 들어가 보니까 그 분은 라디오 드라마의 作-演出을 겸해 혼자서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고, 조연출겸 효과는 李相萬.
그 당시의 드라마는 모두가 30분 ‘방송무대’만이 순수 드라마 시간이었고, 그 밖에는 京電시간, 민족청년단 시간, 그리고 뉴스로 엮는 軍政廳 시간 등이 있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란 낭독소설을 내보낸 뒤부터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 때는 어느 시간의 드라마이건, 방송이 나가기 전이라도 과장과 부장의 도장만 받으면 편성부와 한 방에 있던 서무부에서 그 날로 원고료를 지불해 주었다.
액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술 먹고 노는 데는 충분했다.
그 분은 얼굴 빛이 거무스레한데다가 키도 크고 체격도 당당했다.
그래서인지 하루에 드라마를 두 편 정도 쓰는 것은 예사였다.
그래서 나도 질세라 쓰기만 하면 원고료가 나오니까 그 맛에 줄기차게 써댔다.
金永壽씨는 참으로 연출도 잘 했다. 자기의 작품 뿐 아니라 남의 작품도 해석이 정확했고 연출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었다.
마이크 앞에서 잡음을 피하기 위해 미리 연출 대본을 뜯어 가지고는 한 장이 끝날 때마다 그 한 장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방법을 쓴 것도 그 분의 창안이었다.
나는 드라마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분과 무척이나 가까이 지냈다.
그 분은 영어를 잘해서 미군 고문관도 친했기 때문에 퇴근을 할 때는 미군용차인 ‘스리쿼터’를 이용했는데 나도 같이 타고 아현동 고개 아래에 있는 그 분 댁으로 놀러 가곤 했다.
그 분은 그 다지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기만 하면 술에 취해서 곯아 떨어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부인은 세상이 다 아는 성악가인 趙錦子 여자.
슬하에는 아들과 유미, 나미, 다미, 은미등 네 딸이 어린 공주들처럼 집안을 빛내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이던가, 눈이 몹시 내리는 밤이었다.
그날도 술 때문에 휘까닥 가버린 나는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는 팬츠바람으로 장독대로 올라가서 덜렁덜렁 춤을 추어댔다. 부인과 공주들이 어머 어머 하면서 내다보는데도.
그만큼 그 댁엘 가면 마치 내집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건강한 탓인지 음식을 먹는 것도 탐스러웠다.
“이봐요, 유호씨. 작가란 말야 잘 먹어야 해요. 그래야 힘을 쓰거든. 힘이 있어야 하루나 이틀 밤쯤 새워도 끄떡 없단 말요”
어느 날 밤이 늦어 가지고 그 분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 분은 성미가 급해서 100장이면 100장, 원고지에다가 넘버링으로 탁탁탁 장수를 찍어가지고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만년필도 두 세 개, 색연필도 서너 개를 옆에 놓고.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시나리오는 이미 끝나 있었다.
“아니 벌써 다 썼어요?”
“까짓거 시나리오 한 편 쯤야…”
영화사에서는 원고를 받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원고를 다시 들고 왔다.
“왜 마음에 안든대?”
“그게 아니라요, 저…감독이 읽어보구 몇 군데 고쳐주셨으면 해서…”
“알았어! 다시 써줄게 두고 가!”
그 분은 150장이나 되는 원고지를 좍좍 찢어버리면서 히죽이 웃었다.
다리를 무릎까지 자르고도 “나는 쓴다, 손이 있는 한…”
김영수가 쓴 <나의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