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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무릎까지 자르고도 “나는 쓴다, 손이 있는 한…”
관리자 2007-03-12
<유호씨의 비화 연재---1990.11.1 방송작가협회보 게재>
방송작가들의 감춰둔 이야기 (6) 兪 湖
 
다리를 무릎까지 자르고도
“나는 쓴다, 손이 있는 한…”
 
金永壽씨는 작품의 소재를 주로 서민의 생활에서 찾았다.
앞서 말한 ‘素服’ 이 그러했고 연극 경연대회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받은 ‘血脈’ 역시 그러했으며, 라디오의 ‘朴서방’ ‘굴비’  TV의 ‘거북이’ ‘빼고 둘이요’ 등 역시 그러했다.
그 모든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애환이 대사를 통해서 살아 숨쉬는 듯 했다.
힘이 있고 일에 대한 의욕이 대단했던 그 분이 뜻하지도 않게 6.25가  나기 전 한쪽 발가락을 잘라내야만 하는 수술을 했다. 확실한 병명은 아직까지도 모르지만, 살이 흐물흐물해져서 마치 백설기처럼 부서지는 병이라고 했다.
발가락을 잘라내고도 그 분은 태연했다. 그러나 수술이 잘못 되었던지 얼마 안가서 또 다시 이번에는 한 쪽 발목을 잘라 내야만 했다. 그러고도 그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방송극을 쓰고 연출도 했다.
6.25후 부산 피난 길에서 그 분은 동경의 UN 방송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 모진 병은 그 분을 계속 괴롭혔다. 마지막으로 한쪽 무릎까지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그 분은 단장을 짚고 절룩거리면서도 남산의 방송국 출입을 했으며, TBC-TV의 원고 때문에 서소문의 사옥을 드나들기도 했다.
언젠가 그 분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 병은 내가 알아요. 나는 어렸을 때 홀어머니 하고 구멍가게를 하며 무척 어렵게 살았지. 그 시절의 겨울은 사납게 추웠소. 하도 생활이 어려워서 난 불두 안땐 방에서 지냈는데 그 때 여러 번이나 동상에 걸렸댔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오늘날의 내 병을 도지게 한 거요. 그렇지만 난 작품을 써야만 하니까 두 다리가 없더래두 작품을 써야지. 애 들을 생각해서라두 난 다리 하나쯤 없는 것을 가지구 좌절할 순 없어요!”
처절하리만치 강한 작가 의식이었다.
나는 그분 보다 먼저, 48년 정부가 들어 선 후 곧 정동을 떠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 부임한 국장인 李모씨는 중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을 한 분이라서 국내 사정에는 어두웠다. 중국에서는 원고를 쓰는데 칸을 비우지 않는다. 소설도 그렇고 희곡도 그렇고. 가령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를 쓸 때 위의 몇 칸은 등장인물로 떼어 놓고, 대사에서도, 네! 하는 한마디 아래는 비우게 마련인데 국장은 왜 이렇게 빈 칸이 많으냐, 한국의 작가는 XX놈 심보가 아니냐, 김영수 유호란 사람은 웬 놈의 이름이 이리도 많으냐고 하더란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아닌게 아니라 드라마를 하루에도 몇 편씩 써서 원고료를 받다 보니까 이름 하나로는 안 되겠어서 金永壽씨는 南海林등, 나는 胡童兒등 여러 개의 필명을 사용했다. 金永壽씨는 그런 말을 전해 듣고는 얼굴 빛이 더욱 꺼매지더니,
“깟댐! 아무것도 모르면서. 유호씨, 우리 들어가서 따집시다”
“그런 사람한테 따지면 뭘 해요. 난 방송국을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동을 떠난 것이다.
49년 나는 京鄕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될 줄야.
그 분은 그 신문에 ‘波濤(파도)’ 라는 연재소설을 쓰고 있었다.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이 세월이 흘렀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李相萬씨가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을 알려 주었다. 부인은 미국서 미처 귀국하지 못했고, 유미 나미가 문상을 간 나에게 매달려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얼마 후 李相萬씨가 유족들의 부탁이라면서 그 분의 碑文을 써달라고 했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기에 한사코 사양했지만 끝내 못 이겨 그 비문을 쓰고야 말았다.
     서민으로 태어나
     서민과 함께 살며
     素服
     血脈
     朴서방……
     쓰고 쓰다가 간
     金 永 壽
 

 
<혈맥>과 <굴비>, 작가 김영수와 나
人生은 드라마 貞洞에서 汝矣島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