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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처럼 자란 문학소녀, 세계무대에 우뚝 서다
관리자 2007-05-20
*1991. 9.20  한국일보(시카고) 창간 20주년 특별시리즈
시카고 올드타이머---소설가 김유미씨 '삶과 철학'
공주처럼 자란 문학소녀, 세계 무대에 우뚝 서다
'2세와 문학에 심혈 기울여" 밤마다 글쓰기, 저서 5권
 
"문학--그것은 일종의 그림이며 거울이다. 정열의 표현이며 극히 날카로운 비평이며, 도덕에 대한 교훈이며, 동시에 인생의 기록이다" 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의했다.
1981년 9월, 태창문화사에서 발행안 김유미 작품집 <보이지 않는 그물>을 들고 신문사를 방문한지 만 10년째.
'재미 여류작가'란 타이틀이 무색치 않게 밤마다 많은 그림을 그렸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으며 스스로의 인생이 귀중함으로 해서 타인의 인생까지 꿰뚫어 보면서 쉬지않고 기록해 가는 동안 이젠 재미 여류작가에서 '재미'의 접두어를 뗄 차례인가?
문학에의 길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그동안 수없이 고통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달려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보통명사' 이리라.
지난 63년 도미해 미국생활 28년째인 김유미씨(50)를 '올드타이머'로 소개한다.
현재 제미슨 스쿨 이중언어교사이며 <칭크><억새바람>등 5권의 책을 낸 소설가로서 한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간은 일리노이 한국학교교장, 미주 재미한인학교 협의회부회장, 한겨레 신문 시카고지사 논설위원을 지냈다.
                                                                                      
"20대에 뭘 알아서 소설을 쓰냐? 글쟁이에게 정년 퇴직은 없으니 서두르지 마라"
선친(소설가 고 김영수씨)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이화여중 2학년때 시를 써서 '학원'지 등에 발표했고 여고2학년때 쓴 '밤과 낮'이란 시로 이화문학 공로상을 타며 교지 '거울'을 만드는데 간여하는 등 문학인들이 들끓는 가정과 학교에서 어김없는 '문학소녀'로 자랐으나 부친의 따끔한 충고때문에 문단 등단이 늦어진 셈이다.
이대 국문과에 진학, 학보사 기자를 하며 습작기를 거쳤고 63년도에 졸업하자마자 22세의 한창나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시카고 근교 오로라에 있는 미드웨스트 방송학교에 적을 두고 "3년만 공부하고 돌아가서 고국의 방송계에서 일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당시 한국의 최고 패션인 앙드레 김 의상을 잔뜩 챙겨 콧대높은 여자 유학생이 되어 고국을 떠나 왔으나 미국의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낯 설고 물설고 언어설고, 게다가 가족이나 친구마저 없는 곳에서 이를 악물고 외로움과 울적함을 견디며 공부에 전념하기가 그리 쉽지않은 탓도 있겠지만, 경기고 출신에 퍼듀공대 졸업생인 미남 신랑감 안영기씨(54세-엔지니어)의 출현으로 64년도에 꿈 같은 결혼의 관문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딸 둘을 낳으며 미국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가는 동안 스스로에 대해 희의가 생기면서 "이렇게 세월아 가거라하고 마냥 있을 수 없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끓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월급봉투를 위한 일은 싫었다.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가 "선생이 되어보자"는 결론을 얻었다.
대학졸업후 벌써 7~8년간이나 책을 놓아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일리노이의 내셔날 교육대학원에 등록, 낮에는 아이들을 키우고 밤에는 공부하는 엄마가 되었다. 2년반의 세월동안 한국인의 긍지가 용솟음쳤다. "한국사람들은 똑똑하다, 눈이 없나 코가 없나, 내가 미국인과 경쟁해서 져야할 이유가 어디있나" 자신을 부추겨 세우며 'I can do it'을 되뇌이는 동안 치기 아닌 오기가 생긴 것이다.
결국 교사자격증 획득을 위한 필기-구두시험을 치뤄내고 70년 대 중반  이민 물결이 세어질 무렵 시카고에서 이중언어교사가 될 수 있었다.
베이트만, 암스트롱, 피터슨, 제미슨 스쿨에서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며 '뿌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 한국의 의식, 얼, 뿌리를 당당히 심는다는 것은 한국말 교육이 우선임을 깨닫고 무보수로 한국학교 교장직(일리노이 한국학교)을 맡아 4년 반 동안 심혈을 기울여 2세 교육에 힘썼다.
한국학교 문집을 5집까지 만들며 한극교육을 하는 동안도 한국식을 중시, 소수민족 그룹으로 아이들이 격리되지 않게 이왕이면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리더격이 되게 훈련하려 애썼다.
"동료 그룹에서 외톨이가 되면 미국서도 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미 문화 사이에서도 떳떳하고 올바른 인간, 조국관, 민족관이 바로 선 2세를 키우기에 신명을 걸었다.
지금 재직하고 있는 제미슨 스쿨에는 이제는 한국 아이들이 2백명이나 된다. 에트닉 그룹으로 기죽지 않으려고 한국인 학부모를 위한 영어교실도 열고, 초기이민 부모와 학생을 위한 상담도 해, 가정마다의 심각한 갈등이나 교육난제를 푸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 잦아졌고 의무나 사명처럼 되었다.
그런 날들의 소신이 곧 <미국학교의 한국아이들>이란 책이며 <뜨거운 가슴으로>란 에세이 및 수기로서 살아가는 틈틈이 아니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조국애의 사랑때문에 글을 쓰다가 한때는 '반정부 여성운동가'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86년 2월 김대중 선생이 시카고를 경유, 한국으로 들어가던 날, 자의로 직장을 결근하고 공항까지 나가 배웅을 했다.
"민주화를 위해 온갖 고난의 길을 밟으면서도 투쟁하는 모국의 양심인을 위해 이 정도의 성의는 보이는 것이 도리요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남자분이 화환을 들고 나온 것을 대신 김대중 내외분께 걸어 드렸는데 그 장면이 '시카고 트리뷴' 지에 보도되자 더더욱 반정부하는 사람으로 몰렸다.
88년도에 출판한 수기 <뜨거운 가슴으로>도 그 당시에는 양심이 느끼는대로 쓴 글이지만 반정부성 내용이 많다하여 처음 맡긴 출판사에서 원고가 사라지는등 해프닝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특정인을 무조건 지지한다거나 반대하는 행위는 독재체제를 키울 가능성이 많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전씨든 노씨든 정정당당한 민주정치에 의해 대통령이 되는 풍토 정착을 위해 노력해왔으므로 반정부 여성운동을 했다기 보다는 '반독재'운동을 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 일 것이다.
모국을 생각하면서 어제나 오늘이나 가슴이 메이며 "북한도 내조국인가?"란 물음 앞에서 애정을 갖고 봐야할지, 적대감을 갖고 봐야할지...이제 분단된 국가는 전세계에서 한국뿐이라는 서글픈 인식이 앞선다.
5공때는 '광주사태'가 불순분자의 반동이 아니고 민주항쟁이었다고 주장하면 감옥을 갔고, 양심의 소리대로 글을 쓰다간 밉상 받기 일쑤였지만 그래고 '글 쓰는 일'은 하루 일과에서 거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어떤 때는 학교일 마치고 저녁 설겆이를 끝낸후 작품 구상에 골몰하며 콩나물 꽁지를 따다가 꽁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것이 몸통을 죄다 버린후 실소를 금치 못한 때도 있었지만 교사직 외에 또 다른 일인 '문학작업'에 신명을 바칠 수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89년에는 홍콩서 열린 제6차 한민족회의에 참가했으며 그후 한국의 문학지에 <미국속의 한인문학>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89년 가을에는 카나다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가, 프랑스의 게오르규, 오스트리아의 시인 에릭, 한국의 소설가 이호철, 김문수, 남정현씨등과 친교를 나누는등 새로운 경험도 했지만 "문학작품은 꼭 한국어로 쓸것"이라고 다짐한다.
미국학교 교사가 될때 영어의 부족을 느꼈지만 아무리 영어를 많이 쓴다 하더라도 어렵듯이 '모국어'는 한글이기 때문에 소홀해져 또 갈고 닦는 작업이 필요한 때문이다.
"한동안 한국에서 문학지가 오면 첫 장부터 끝장까지 샅샅이 읽고 어떤 소설은 구둣점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카피해 써보기도 했다" 하는데 30년 가까운 이민생활동안 모국어 기술능력이 녹슬었을까 싶어 자신없어 하는 스스로가 싫어서였으며, 선친의 말씀대로 "1시간을 쓰려면 3시간씩 읽어라"는 당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대표소설 <소복> 희곡<혈맥>등을 남기고 77년 작고했으며 방송국 전속작가로 활약, <마부><굴비><박서방>등으로 유명했던 고 김영수씨의 4녀1남중 둘째 딸로 집안서 유일하게 소설가로서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큰 일에든 작은 일에든 있으나마나한 존재보다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부모님의 영향이 살아가면서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정동 방송국 어린이시간 노래지도를  했으며 현재 시카고서 생활하고 있는 어머니 조금자씨(78세)는 소녀처럼 목소리가 고아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셈.
결국 인간인 이상 자기가 받은 교육, 받은 혜택을 가정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아무리 여성이라 할지라도 껍데기 인생을 살아가지 말자"는 주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직까지 골프 한번 쳐본 적이 없이 쫓기다시피 살고 있지만 글은 저절로 나오지 않으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무엇이든 뜻있는 일을 찾아 허송세월을 않는다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할 것이라고 늘 다짐하고 있다.
"삶이 주는 공허의 여백은 누가 외부에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50대초반의 언덕에 서서, 이중언어 교사니 소설가니 하는 타이틀을 갖고 되돌아 볼때 남편의 1백% 서포트가 무엇보다 고맙게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가끔 시카고의 '낭만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큰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제는 크리스틴(25), 엘리자벹(23) 두 과년한 딸의 어머니로서, 선친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지난 여름방학을 꼬박 투자, 생전에 친한 친구셨던 황정순, 김희갑, 김동원씨등 연극배우, 탈렌트등과 김동리, 전숙희, 안수길, 박영준씨등 작고 및 현존 작가들과의 교분을 더듬으며 그분의 <일생기> 발간준비를 하며 또 한번 바쁘게 살았다.
개인적으로는 87년에도 시카고에서 뵌 함석헌 옹을 존경하며, 작가로는 버지니아 울프, 카프카등을 좋아하지만 고교시절부터 습작해 온 시만도 70여편에 이를 정도로 시를 사랑한다.
 
     나는 그냥
     네 뜰에 다녀가는
     바람이었으면 싶고
 
     나는 그냥
     네 창가에 스쳐가는
     달빛이었으면 싶고
    
     나는 그냥
     네 잠속에 찾아드는
     꿈이었으면 싶고
  
     나는 그냥
     네 곁에 서 있는
     그림자였으면 싶고
  
     그리고 아아...그리고
     나는
     너의 심장이고 싶어라
     목숨이고 싶어라
                                             ---김유미 시 '욕망' 전문
 
문학의 여러 장르를 뛰어넘는 작가로서 한때는 바늘귀 하나 제대로 못꿰고 찬물에 걸레를 빨아 본적도 없이 책을 끼고 낭만을 구가하고, 학보사 기자로 판문점을 다녀오고 '여원사'등 여성표지 모델을 서고, 앙드레 김 의상으로 채운 가방을 들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남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하나?"라는 오기와 악착같은 집념으로 아이들에게 안감넣은 오바 까지 만들어 입히며 이중언어교사로, 어머니로서, 이민의 개척자로서의 길을 걸어 오는 동안 '초로'의 언덕에 이르렀다.
앞으로 다다를 인생의 '고지'에서 그가 성취할 것은 또 무엇인가.
아마, 계속 고뇌하며 달려 갈 것 같다.                               <배미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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