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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김영수의 열정
관리자 2007-12-09
*필자 미상의 회고담 일부
 
해방직후의 金永壽---열정과 多作
 
(앞부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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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이 멀다 하고 幕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金永壽는 밤 낮 없이 극본을 써야 했다.
한데 문제는 흥행이었다.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一流級 배우를 유치해야 하는데, 이상 야릇하게도 해방이 된 후 연극계는 거의 다 연극동맹에 가입한 左翼성향의 배우들이 많았다.
"사상이 무슨 문젭니까? 우리야 작품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니겠소?"
김영수는 <여사장>에 김복자 상대역으로 박제행을 쓰고 싶다고 주장했고, 중앙극장장인 박상진은 극구 반대했다.
"그 쪽 사람들은 웬지 께림칙해요. 그냥 적당히 우리 안에서 정하도록 해봅시다."
"아니, 우리가 정치가요, 사상가요? 우리야 연극쟁이 아니요. 왜 우리마저 편을 갈라 사상 싸움에 말려듭니까?"
김영수가 우겨서 결국 박제행을 <여사장>에 주인공으로 썼다.
영수는 그랬다.
일단 이 사람이다 하면 그가 어느 단체에 속해있든 설사 그가 좌익성향의 배우라 해도 우격다짐을 해가며 그를 썼다. 나중에는 하도 많은 배우들이 연극동맹에 가입해서 그런 배우를 쓰기 위해 매수를 하다시피 해야했다.
단역이든 주역이든 役만 맡으면 월급이 나오기 때문에 배우들이 역을 따낸다는 것은 생계와 직접 연관이 되는 심각한 일이었다.
해서 어떤 배우들은 아예 김영수 집에 찾아와 역을 준다는 약속을 받기 전에는 떠나지 않는 배우도 있었다.
배역은 주로 연출가가 정하는 것이었지만 김영수는 작품을 쓸 때 이미 '이건 이 사람, 저건 저 사람' 하는 식으로 배우의 이미지를 떠 올리며 쓰기 때문에 배역도 도맡다시피 했다.
朱善泰, 박현희 같은 배우는 김영수가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하면 아예 北阿峴洞 김영수 집으로 찾아 와 밤샘을 해가며 役을 조르기도 했다.
그렇게 떼를 쓰다시피 졸라대면 김영수는 정에 약해서 때로는 전혀 역이 맞지 않아도 주고, 실수를 해도 또 역을 주곤 했다.
연극단체들이 태어났다가 한두 작품만 올리고 사라지고 했지만, '신청년'과 '劇協'은 가장 인기 있는 단체로 자주 공연을 했고, 좌익성향 단체들 중에서는 '아랑'과 '高協'
의 활동이 제일 활발했다.
박재행, 황채리, 서월영, 고설봉, 강계식, 김복자, 김양춘, 노재신, 송미남, 이해랑, 김동원, 김승호, 황정순, 최은희, 주선태, 추석양 등등, 숫한 연기자들이 金永壽의 작품을 거쳐 갔다.
연기자 치고 주역이든 단역이든 김영수의 작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 였다.
김영수의 狂氣는 연극 막을 올릴때 극에 달했다.
첫 무대 막이 오를 때면 무대 감독이 징을 치는 게 상례이건만, 영수는 감독의 징을 빼앗아 들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분장실로 화장실로 뛰어다니며 징을 쳤다.
<오남매>를 '신청년' 창단 작품으로 시작해, <사랑> <가로등> <반역자> <사육신> <상록수> <여사장> <털보> <혈맥>...등등 中央劇場에서 공연을 했다.
두 달이 멀다 하고 幕을 올려야 하니까 多作을 하면서 김영수는 현실과 이상을 타협해야 하는 난관에 자주 부딪쳤다.
작품을 쓸 때, 문학성보다 흥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배역, 무대장치, 小道具, 의상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이건 작가에게는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마다 김영수는 극단측의 시비를 받아야 했다.
..............(뒷부분 미상)
 
 
유 호 <반석과 같았던 분--김영수>
해방기 연극 연구 (이석만지음, 태학사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