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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호 <반석과 같았던 분--김영수>
관리자 2007-12-09
'한국 연극 재발견' 첫 번째 무대 <血脈>
국립극단 제178회 공연 팸플릿
1998년 6월12일(금)~21일(일)
 
磐石과 같았던 분
兪 湖 (방송 극작가)
 
1938년, 제2 高普(형 景福高) 4학년때, 나는 朝鮮日報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응모를 했다.
그해의 당선 작은 <素服>, 작가는 金永壽. 김영수란 이름 석자가 평생 가슴에 새겨진 순간이었다.
그분은 일제하 中東高에서 농구선수를 했고 성적이 우수해서 재단측의 추천으로 일본의 早大 영문학부로 유학을 했다. 귀국하면서 문단으로 진출, 소설, 희곡, 라디오 드라마 등 모든 분야를 설렵하기 시작했다.
1943년과 44년 나는 東洋극장에서 문예부와 선번부 일을 겸임하면서 당시 내노라 하는 극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劇作法을 배우며 2편의 劇本을 상연했다.
김영수 선생은 1941년 9월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靑春座'와 '호화선'의 함동공연인 <찔레꽃>을 각색했고, 1943년 4월에는 李光洙의 <사랑>을 각색, 1943년엔 <역마차>를 상연한 기록이 남아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그해 10월 나는 貞洞 고개마루에 있던 中央放送局에 입국,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김선생은 먼저 入局해서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었으며 유일한 연출자였다. 美軍政下시대라 영어에 능통한 그분은 미 고문관들과의 의사소통이 자유로워 일을 하기에 편리했다.
이름만 기억하고 있던 그 분을 직접 만나보니 六尺 거구에 걸걸한 목소리, 원고를 쓰는 자세가 힘이 있고 자신이 넘쳐 보였다.
연출면에서 그 분이 후배들에게 한가지 남겨 준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이크 앞에서 조금이라도 잡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극본의 프린트 한장 한장이 끝나는 대로 그냥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라 작가들의 소재나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서 몇 달 동안은 그분하고 둘이서 3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를 써대야만 했다.
이래저래 그 때부터 그분과의 긴 교분이 시작된 셈이다.
하루 일이 끝나면 나는 美고문관실에서 그 분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내주는 미군용차인 '스리쿼터'라는 차에 동승을 해서 거의 매일처럼 아현동의 그분 댁으로 가서는 식사와 술을 맘대로 제공받고, 취하면 그분 서재에서 내집처럼 자곤 했다.
부인이신 趙錦子 여사는 한번도 언짢은 빛을 보인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 어리디 어린 세 공주인 나미, 유미, 다미, 그리고 아들 하나는 그랬으리라.....체 저 사람은 누구길래 매일처럼 와서는 먹고, 취하고, 자고, 참 뻔뻔스런 사람이라고. 어느 해 겨울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다. 술이 취한 나는 팬츠바람으로 뛰쳐나가서는 장독대로 올라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놀란 일이 있었다.
6.25 전쟁때까지 우리나라의 라디오 드라마界를 누비다시피 한 선생은 뜻하지 않은 상처로 인해 발가락 한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지 얼마 후 그분은 東京에 있는 UN군 사령부 心理戰課의 작가로 옮겨 갔다.
그러나 몇년 뒤 발의 상처가 도지는 바람에 다시 수술을 해서 결국은 한쪽 다리의 무릎아래까지 절단을 했다. 그 원인이 어릴 적에 걸렸던 凍傷 때문이라는 얘기를 그분이 들려준 일이 있다. 선생은 의족을 달고 단장을 짚고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귀국을 했다. 조금도 고통을 내비치지 않았다. 육척 거구에 걸걸한 그 목소리, 때로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 너털 웃음, 변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의족을 벗어 놓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오히려 반석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장 하나를 짚은 것 뿐.
작품 집필과 연출에 대한 의욕과 집념은 더 했다. 건강한 사람 이상으로 라디오드라마를, 그리고 TV시대가 열리면서부터는 선생의 활동은 더욱 불을 당긴 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기에 선생은 京鄕신문에 연재소설 <파도(波濤)>를 시작했다.
나는 문화부의 평기자로 선생을 매일 만나게 된 것이 더없이 기뻤지만 저녁때만 되면 문화부장인 金光州씨와 단둘이서만 모처로 사라지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다. 바람결에 그분의 건강이 썩 좋지않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데도 타고난 게으름때문에 선생을 찾아 뵙지 못했다.
선생의 부음을 접한 말, 비가 부슬부슬 뿌리고 있었다. 부인은 미국에 체류중이었고 빈소에는 나미, 유미, 다미, 아들이 정신 나간것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더 건강하셨더라면 우리나라의 방송, 예술, 문화계를 휩쓸고도 남으셨을 터인데...
<혈맥> 初演을 나는 중앙극장에서 보았다. 그렇게도 만족해하시던 모습과 객석의 박수소리가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것 같다.
더구나 이번 연출을 맡은 林英雄씨는 金永壽선생과도 잘 알고 지낸 사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 두분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선생은 저승에서 쉬고 계시지만 한은 없으리라 믿고 싶다.
<혈맥>이 살아나고 또 하나는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따님 유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았음인지 미국에서 20년 넘게 文才와 사랑의 정신을 발휘하여 在美한국인 사회의 발전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해가 되었나, 선생이 타계하신지 한해가 가까워 올 무렵 나는 유가족의 뜻이라면서 선생의 碑文을 부탁받았었다. 나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기에 끝내 사양을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서 긴 세월을 함께 해온 정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서 다음과 같이 적어 드렸다.
 
      서민으로 태어나서
      서민과 같이 사시면서
      朴서방,
      굴비,
      血脈...
      쓰고 쓰시다 가신 분
      金  永  壽
 
유민영 <김영수의 혈맥 공연>
해방 직후 김영수의 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