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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과 <굴비>, 작가 김영수와 나
관리자 2007-03-11
<혈맥>과 <굴비>, 작가 김영수와 나
김 수 용<영화감독, 예술원 회원>
 
<혈맥>---삼팔 따라지들의 애환을 그리다

<혈맥>은 나의 스물 한 번째 작품이다.
‘한국 영화총서’에 따르면 1963년에 제작된 148편의 영화 중 두 편의 문예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혈맥>이다. 이때 벌써 문예영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일본에서 전래된 듯 한데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 뜻이 약간 변질 되었다.
원래는 문학적으로 평가 받은 작품이 영화화되어 그것이 원작과 버금가는 수준으로 만들어진 것을 가리키는데, 한국에서는 예술성 짙은 영화쯤으로 간주되었다.
지금도 문예영화의 뜻은 애매하다. 하여튼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를 예술 행위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이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는 말은 듣기에 나쁘지 않다.
그러나 <혈맥>이 제3회 대종상 4개 부문을 수상한 날 밤, 나는 슬픔과 실의에 젖어 시상식이 있던 중앙청에서 신당동 집까지 걸어 왔다.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석권했는데도 정작 감독상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리며 목이 쉬도록 현장 지휘를 한 보람도 없이 좋은 각본에 연기력 있는 배우들이 출연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감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영화감독을 교통순경쯤으로 간주하는 심사위원들이 미웠고, 그때까지 독식하던 신상옥이 오히려 불순해 보였다. 그 해부터 시작된 조선일보 제1회 청룡상에서도 <혈맥>이 5개부문을 수상했는데, 그 심사위원들에게도 여전히 감독은 이 작품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보였나 보다. 나는 그때 인간은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무 편이나 되는 영화를 만들면서 일관된 주제를 갖는다거나 이른 바 작가 의식이 투철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영화는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었던 데다 영화를 만드는 그 자체가 즐거웠을 뿐이었던 사람이 예술가 대접을 받고 싶어하다니.
나는 영화는 꼭 예술이어야 하나, 또 상에 대한 욕심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놓고 끝없는 회의와 갈등 속에 휘말렸다.
내가 <혈맥>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많은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강한 개성을 지니고 동일한 공간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다는 극적 무게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선 인물에 포커스를 맞춰야겠다고 생각하니, 캐스팅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내용을 설명할 시간은 없다.
김영수의 희곡은 남산 기슭의 방공호가 주무대이며 월남 피난민들의 가난과 무지, 부모 자식간의 끈끈한 정, 형제애, 사랑과 배신, 사회적인 불안과 좌절, 양키문화의 쇄도, 젊은이의 절망이 뒤엉킨 드라마이다.
이 군상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불러 모은 배우들은 남자배우 김승호, 최남현, 주선태, 추석양,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과 여배우 조미령, 김지미, 황정순, 이경희, 송미남, 엄앵란이었다. 그리고 흑인 병사로 조지프리맨이 캐스팅 됐다. 이들은 연극 <혈맥>에 출연한 경험이 있거나 무대를 구경한 사람들이었다.
촬영장소를 남산 기슭 해방촌으로 정했다. 꼬방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지만 지대가 높아 이들은 늘 서울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산다. 하늘 끝에 매달린 교회의 십자가도 그들의 발밑에 있다. 나는 많은 출연자들이 등장함으로써 드라마가 산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잡초가 우거진 공터에 설정한 천막촌에서 카메라를 밖에 드러내 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그 매력이 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연극적인 분위기를 기조로 롱테이크를 빈번히 사용했다.
가령 이경희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운구하는 마을 사람들의 긴 행렬이 십자가 위를 구름처럼 지나가지만 애통해 하는 가족들의 얼굴은 전혀 삽입하지 않고 실루엣의 화면을 방치하듯 내버려 두었다.
이 작품에서는 배우들의 열띤 연기가 오히려 감독을 난감하게 하기도 했다.
김승호와 황정순은 처마 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사는 이웃인데도 늘 으르렁거리다가 어느 날 몸싸움을 하며 땅바닥을 구르는데, 두 배우는 연기 욕심이 많아 다시 한번 더 찍자고 번갈아 고집부리는 바람에 나는 같은 장면을 스무 번이나 찍어야 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촬영기사 전조명은 첫 번째만 필름을 돌리고 나머지 열아홉 번은 모두 다 카메라를 겉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승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네 번째 것이 좋았다고 했고, 황정순은 감독의 귀에 대고 마지막 것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지미와 흑인 병사의 러브 신도 퍽 뜨거웠다. 엄앵란과 신성일은 아직 결혼 전이었으며 두 사람은 깍듯이 선후배로 맞섰다. 엄앵란이 반말을 쓰는데도 신성일은 기가 죽어 경어를 사용했고, 엄앵란은 선배로서 후배 신성일의 연기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여기서도 고학생 최무룡은 김지미를 짝사랑하지만 잘 풀리지 않아 실의에 빠져 있었고, 우직한 형 신영균은 동생을 위해 노동판에서 땀을 흘렸다.
오직 생존을 위해 가난과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월남 피난민들, 스스로를 삼팔 따라지라고 자학하면서 한 조각 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많지 않다. 더욱이 잡초가 우거졌던 달동네 공터에 즐비하게 건립된 빌딩을 보고 옛풍경을 상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혈맥>은 우리의 아팠던 과거의 한 단면을 필름에 각인한 기록이며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자화상이다.
 
<굴비>---표절 시비, 예술적 영향, 재창조의 삼각관계
 
다음 차례는 <굴비>(1963)였다. 이 작품은 KBS 라디오 연속극이었으며, 김영수가 원작과 각본을 썼다. <굴비>에서는 농촌에 사는 늙은 부부<김승호, 황정순>가 도시에 사는 아들 딸을 찾아 다니며 겪는 수모를 그리고 있다.
큰 며느리 집에서 안마당 가득히 널어 놓은 굴비 한 마리를 먹고 봉변을 당하는가 하면, 큰 사위는 회사 직원들에게 늙은 장인 장모를 시골 묘지기라고 소개한다. 여관을 경영하는 작은 딸은 투숙객이 넘치자 보일러실에 친정 부모를 재워 두 노인은 밤새 한증막에 있는 듯 땀을 흘린다. 자식들에게 기가 막힌 대접을 받고 집에 돌아가려 하지만, 작은 며느리가 떠오르자 이들은 그녀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6.25때 남편이 전사하고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삯바느질로 구차하게 살아가는 며느리의 얼굴이 보고 싶어 서대문 밖 영천 달동네 꼭대기를 기어 오르는 늙은 부부. 며느리를 찾은 그들은 예기치 않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이튿날 국군 묘지로 아들을 찾아 간 노부부는 그 곳에서 마음 껏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관객을 실컷 울려보고 싶다는 충동과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형식미에 끌렸기 때문이다. 가령 수없이 많은 굴비가 줄에 매달린 영상이나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빈민촌의 지붕들, 끝도 없이 줄지어 선 국군묘지의 비석들을 화면에 옮기고 싶었다. 극대화된 물질과 왜소한 인간의 모습을 대비시켜 표현할 때 어떤 상징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내가 조금씩 영상 언어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김영수의 양해도 없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설정하여 이 영화를 동일한 장소에서 시작되고 끝나게 만들었다. 즉 기차가 산기슭 터널을 빠져 나오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터널 속으로 그것이 사라지는 영상으로 작품을 끝냈다. 터널 속으로 사라지기 전 기차 내부의 장면도 추가로 설정했다.
 
기차의 차창 밖으로 산 그림자가 따라온다. 노부부는 말없이 그런 풍경을 바라본다. 앞자리에서 한 무더기의 젊은이들이 소주잔을 들고 떠들썩하다. 한 사내가 할아버지에게 술을 권한다. 덥석덥석 몇 잔을 받아 마신 김승호가 말한다.
“당신들 말여, 우리 아들 딸처럼 효성스러운 애들 못 봤을 걸. 어찌나 서로 효도하겠다고 덤비는지 귀찮아서 이렇게 시골로 도망가는 길이라구”
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떨어진다.
지금은 유료 양노원이 번창해서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아도 큰 허물이 되지 않는 시대다. 그러나 34년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구에서 은퇴한 노법관이 이 영화를 보고 자살했다는 한국일보 보도를 읽고 나는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굴비>는 흥행 성적도 좋았고 영화평도 좋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일본 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있기 전이기도 했지만, 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방송사에서 그것도 몇 달씩 시청자의 눈물을 짜게 했던 일일 연속극이 표절이라고 믿고 싶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뒤 한 30년쯤 흘렀을까, 나는 우연히 문제의 각본을 볼 기회가 있었다.
여교사인 막내 딸과 함께 어촌에 살던 노부부가 오사카, 도쿄 등지에 거주하는 자식을 만나러 간다. 개인 병원 의사인 큰 아들은 소문보다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어 잠자리가 불편했지만 큰 며느리는 시부모를 따뜻하게 모신다. 미장원을 하는 딸네 집에서도 불편해진 노인들은 전쟁 미망인 작은 며느리 집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할아버지는 옛 친구들과 만나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결 같이 도시보다 시골 생활이 좋았다고 입을 모으며 자식들이 냉정해졌다고 불평한다. 집으로 돌아 온 할머니가 과로로 쓰러지고 자식들은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생각은 자신들의 비즈니스에 가 있다. 어딘지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 영화 <해리와 톤토>도 자식들을 찾아 다니던 할아버지가 혼자 숨지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로 아트 카나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감독은 알게 모르게 남의 이야기를 표절하기도 하고 표절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든 자기 목소리로 연출할 수 있는 독창성이 아닐는지.
 
김수용 <나의 사랑 씨네마>, 2005, 서울: 씨네21. PP.44~51에서 전재
다리를 무릎까지 자르고도 “나는 쓴다, 손이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