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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에세이 <신변상화> (下)
관리자 2007-12-08
조선일보  1940.3.9
身邊想華 (신변상화) (下)    金 永 壽
 
筆禍
 
소설이나 희곡을 쓸 때 나는 지금껏 그리 좋은 것은 아니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버릇 하나가 있다.
가령 소설에 있어서 A라는 주인공을 설정하여 놓으면 나는 반드시 될수 있는대로 내가 익숙히 아는 세계안에서 이미 마음 속으로 작정해 놓은 A的인 성격을 가진 혹은 A적인 타입을 한 인물을 골라내야만 붓을 든다.
이렇게 구체적인 어느 대상이 있어야만 작품을 얽어 나갈 수 있도록 조련을 받은 나는 확실히 작가로서의 편의를 모르는 계급일게다.
이 때문에 나는 왕왕히 이미 몇 달 전부터 테마도 정해놓고 구성도 해두었음에 불구하고 정작 인물을 고르지 못해서 두 달 혹은 석달씩 흐지부지 보내는 수가 참 많다.
이것 역시 어느 면으로 생각하든지 나에게 있어서는 남이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뇌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악습 때문에 간혹 나는 친구로부터 혹은 내가 이미 熟親히 아는 여인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공격을 받는 수가 또한 많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모 월간잡지에 단편 하나를 발표하고 얼마 지난 후였다.
社에 나가서 막 일꺼리를 벌려 놓고 손을 대려니까 전화로 지금 시급히 나를 만나 보고 싶다는 여인이 있었다. 급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종로 '심원'으로 나와 달라는 것이다.
목소리로서는 나는 그가 누군지 전화를 받자 대듬 알아 듣고서 저윽히 남감하여 마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벌써 한 1년째 의식적으로 내가 만나기를 피하고 그뿐 아니라 나의 기억으로부터 그에 관한 모든 생각을 스스로 말소하기에 최대의 노력을 거듭해온 P가 분명함에 아무리 그의 말마따나 지급히 분초를 다투는 긴급사라 할지라도 내 어찌 그를 만나기에 선설할 수 있으랴.
"글쎄요, 지금 좀 바쁜데요"
말 끝을 흐리어 일부러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시원치 않은 대답을 하니,
저편에서는 그대로
"꼭 나와 주세요, 꼭 할 말이 있어요"
연해서 이런 재촉을 두번 세번 거듭하며 채 이쪽에서 말을 꺼낼 사이도 두지않고 탁 전화를 끊어 버림에는 일순 나는 당황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곧 달리 마음과 태도를 정하고 그의 말대로 지정한 장소로 나가기로 한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더라도 큰 잘못이었다.
사실 나는 그를 만나러 가기까지는 그래도 P에게 대하여 지나간 추억을 책장 같이 들추어 가며 그 어느 정다움을 느끼고 이왕 만날 바에야 명랑하게 만나고, 또 명랑하게 헤어지자 하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러한 뜻을 품고 나는 '심원'을 찾아 나섰다.
다방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나는 곧 저편 테이블에 앉아서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고이고 있는 P를 발견할 수 있었고, 동시에 나를 힐끗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그의 예리한 시선과 아울러 너무도 나의 기대를 마구 무시하고 냉냉하였음에는 가슴이 선뜻하여졌고 뿐 아니라 불유쾌해지고 말았다.
그와 나는 자리를 같이 하자 동시에 심각한 無言劇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급한 일이라니 무엇이요?"
내가 먼저 입을 떼고 역시 아까 같이 턱을 고이고 시선을 모아 테이블 복판만을 노리고 있는 P의 얼굴을 비로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대뜸,
"그렇게 유명하게 되고 싶어요?"
한다. 나는 무슨 영문을 몰랐다. 몰라서 더 한번 채근해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왜 하필 나를 모델로 소설을 써요?"
그래도 나는 P의 말을 선뜻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이번 00잡지에 XX란 소설 말예요"
앗차, 나는 비로소 이 말을 듣자 그가 나를 여기까지 호출한 이유며, 그리고 지금 이같이 내 앞에서 서슬이 시퍼래져 있는 전후 사정을 전부 깨달아 알 수가 있었다.
벌써 두어달 전 일이지마는 나는 소설 XX를 쓸 때 그곳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이 P로 가상한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야기의 발단이나 귀결이 P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고 능히 그의 면전에서 지금이라도 주장할 수는 잇으나 그래도 성격이 너무도 흡사함에야 내 어찌 이 긴장한 여인 앞에서 완강할 수 있으랴. 나는 이윽고 입을 봉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도 다시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와 나는 이렇게 서글프게도 입을 봉하고 또한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눈과 눈을 돌린 채 오래간만의 조우를 끝마치고 말았다.
나는 다시 社로 돌아 와서도
"왜 나를 괴롭혀요? 왜..."
하면서 눈물이 글성글성 해지던 P의 얼굴 모습을 쉽사리 잊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 동안에 그렇게도 파리해졌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도 떠 올랐다.
이태 전 내가 본 그 구두, 또한 이태 전 내가 본 그 치마 저고리......
나는 왜 그를 보고 좀 더 따뜻하지 못했던가. 이런 후회도 났다.
나는 그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를 내 소설의 히로인으로 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허지만 그게 지금 와서 무슨 변명이 되랴.
그는 내 앞에서, 서로 만나기를 똑 같이 피해 다니던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가.
(이제부터 꼭 모델은 머리에서 가상으로 만들어내자...)
나는 드디어 이런 결심을 하고 그날 종일 社에서 우울하였었고 또한 그날 종일 P에게 대하여 미안하기 한이 없었다.
그 후부터 나는 소설이나 희곡을 쓸 때 구성보다도 테마보다도 한가지 더 힘든 사무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금 P와 같은 여인을 만나지 않으려는 나의 센치멘탈리즘이다.
 
 
 
#김영수 에세이 <신변상화>(中)
#김영수 에세이 <東京 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