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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평론 <劇界의 1년간>
관리자 2007-12-08
朝光 1939년 12월호 p146
劇界의 1年間
金 永 壽
 
금년에 있어서 우리의 연극계가 하나의 커다란 화제로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新劇 단체의 붕괴와 내지 침체일 것이다.
朝鮮에 있어서 소위 신극의 역사란 그다지 오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은 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의 조선과 신극인들의 辛苦란 너무도 컸던 것이다.
첫째 그들은 경제적으로 불우하였다.
다음으로 그들 신극 진영에는 그들의 무대를 장식할 만한 충실한 극본이 빈약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의 신극인들은 자연적으로 극작가인 동시에 연출가도 해야 되고, 프로듀서이면서도 심지어는 화장을 하고 무대로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금년에 신극진영이 앞을 다투어 좌절되고 폐쇄와 침묵을 선언한 것은, 물론 거기에는 가장 유력한 직접적인 원인이 허다하겠지만, 이러한 허다한 이유 중에는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은 遠因이 動因이 되지 않았을까.
劇硏座, 中央舞臺, 浪漫座 등 세 단체는 상반기에 있어서 미약하나마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신극단체로서의 귀중한 존재들이었다. 사실 이들 세 단체는 과거의 공적을 위해서도 명예를 위해서도 얼마든지 활발한 활동을 하여도 피곤할 줄을 몰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운하게도 극연좌도 중앙무대도 낭만좌도 한결 같이 연극 실천에 있어서 금년은 너무나 무기력하였다.
여기에 일일이 구체적인 지적은 피차의 심정을 위하여 가급적 피하기로 한다.
그러나 약간 생각나는 것을 기록하자면 무엇보다도 신극진영의 총참모본부 격으로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가진 극연좌일 것이다.
<춘향전> 혹은 <목격자>등 再上演物을 반복하였을 뿐, 하등의 창조도 절규도 없었다. 이것은 확실히 연극 당사자에 있어서나 또는 일반 관객에게 있어서나 얼마든지 서글픈 기억있던 것이다.
낭만좌 역시 공연 회수에 있어서는 상반기의 극단 전역에서 민활하였던 것이나 그러나 역시 성공적인 결과를 계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앙무대는 더구나 그렇다. 그뿐 아니라 解散 전후해서 중앙무대의 존재란 과연 비참 그것이었다. 故 延學年씨가 생존해 계실 때, 沈影, 徐月影, 朴濟行, 南宮 仙 등 그야말로 극단의 쟁쟁한 넘버 원 만을 망라하였던 중앙무대의 금년에 들어서의 활동은 너무도 비참하였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 비참이란 말을 썼다. 또 이 말을 두번 되풀이 하기에 나는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
그만치 나는 신극 부대의 산만을 혹은 좌절을 충심으로 통절히 알았고 비분을 느끼었던 것을 이 자리에서 명백히 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그러나 금년 하반기로 들어서며 신극이 무대를 상실하게 되자 동시에 거의 그의 반세력으로서 궐기한 새로운 부대가 있으니, 그는 곧 오늘의 '협동 예술좌'인 것이다.
협동예술좌는 그들의 선언과 같이 스스로 금일의 시국과 정세를 가장 충분히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이 같은 시국과 정세에 가장 적합한 연극부대로서 確乎한 슬로건과 기치를 선두에 내걸고 행진을 선언한 新集團이다.
산재하여 있어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항쟁하고 있는 각종 각양의 신극단체를 종합 통일한다는 것이 우선 그들의 선언이었다.
모든 과거의 주의나 주장을 깨끗이 포기하고 다만 帝國臣民으로서의 시대적인 인식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여기에 상응한 각본을 준비하고 무대를 꾸미자는 것이 그들의 선언 내용이다.
그들은 선봉으로 安基錫, 金承 등 제씨를 내세워 가지고 널리 연극인을 규합하는 동시에 중앙무대의 해산을 하나의 계기로서 그곳에 중심적인 인물을 불러 악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그들은 다시 대동단결이란 목표아래 일보 나아가 낭만좌와 극연좌에게 대하여 의향을 물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동단결을 도모한 그들로서는 우선 제일착의 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종합하는 것이 그들의 열화같은 의욕은 충당되게 되는 연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연좌나 또는 낭만좌가 전원이 일치해서 신집단 '협동예술좌'의 권유를 수락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낭만좌로서의 의견이 있었고, 극연좌 역시 극연좌로서의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뜻 협동예술좌에 가맹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 즉 낭만좌나 극연좌의 포장되었던 의사가 과연 여하한 형체의 것인지, 나는 이곳에 명확히 기록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다만 그들 세 단체 사이에는 이렇다할 만한 의견대립이 있었다는 것보다 단지 상호간의 의견과 의견과의 불일치가 아니었을까-----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는 결코 영원의 불일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 약간의 시간과 장소를 낭비하였더라면 이것은 응당 금일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비추어 보아서 쌍방의 타협점이 얼마든지 있었으리라고 넉넉히 짐작되는 것이다.
낭만좌의 대표 金旭씨는 처음에 단독으로 가맹을 응낙하였던 것이나 나중에 가서는 결국 낭만좌 내부의 의견충돌로 인하여 부득이 初志를 해소치 않으면 안될 불편한 입장으로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극단 '협동예술좌'는 제일착으로 낭만좌와의 교섭에 있어서 결렬의 비운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결렬을 하나의 매듭으로 하여가지고 협동예술좌는 다시금 진영을 공고히 하여가지고 무대로 무대로 달리었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협동예술좌와 낭만좌와의 교섭은 자못 단시일이었으나마, 델리케이트한 회담을 되풀이 하는 사이에 피로를 느끼고서 섭섭히 손을 놓고 각각 구진영으로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낭만좌와는 해결 아닌 해결을 짓고 말았으나, 극연좌와는 그렇게 간단한 과정을 밟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말하자면 협동예술좌로서는 심히 輕便한 경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연좌로서는 이 합동설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내부에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오랜 시일을 끌고 내려오며 함동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보다도 그 필요성에 있어서 의견이 百出되었던 것이다.
그 의견의 상세한 내용을 이곳에 나열할 흥미는 이제와서 나는 조금도 느끼지 않으나, 그러나 그들 간부 사이에 의견의 대립으로 인해서 결국에 가서는 내부에 있어서 두 파로 분립되었던 것이다. 하나는 합동설에 參同하고, 협동예술좌로 가맹하기로 경정한 派고, 다른 한 파는 의연히 극연좌로서의 사명을 구현해보자는, 말하자면 보수파였다. 이러한 양립된 두 파는 얼마를 합의를 거듭하더라도 도저히 同心同體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그들의 주장과 주견대로 각기 갈 곳으로 가고 말았던 것이니, 극연좌로부터 다시금 협동예술좌로 좌석을 옮긴 간부로서는 李曙鄕, 李白山, 李化三, 朴學 등 주요멤버를 비롯하여 10여人이 넘는 대부대였다.
협동예술좌 대 극연좌의 이야기를 이와 같이 장황하게 기술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의 극연좌가 각방면으로부터 너무도 활동이 미미하다는 비난과 공격을 받는, 그 본질적인 원인이 이렇게 내부적인 경과를 보고하므로써 넉넉히 짖거될 수 있는 까닭이다.
과연 극단 '극연좌'는 간부층의 다량적인 이동으로 인해서 우선 현실적 문제로서 공연을 갖기에도 거의 불가능할만한 정도의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이유중에서도 이러한 이유가 가장 으뜸이 되어 극연좌의 금년에 있어서의 활동은 전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반기에 있어서 그들은 거의 해산상태에 빠져던 것을 일반은 잘 알리라 믿는다.
이상과 같은 북잡다단한 교섭을 거쳐 결성된 신극단 '협동 예술좌'는 초두에 국민문화연구소란 경제적 배경을 가졌던 것이나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시적이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朴熙道씨가 주재하는 東洋之光社와 장기계약을 하고 동사의 전속극단으로서의 단원 전부의 월급을 지출하는, 과연 朝鮮서는 처음인 유급제도의 신극단체로 제일선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극단이 앞으로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여 갈는지 그것은 지금에 있어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의문일 것이다. 다만 창립공연인 <東風> 하나만을 가지고서 협동예술좌의 내일의 진로를 점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속단이 아닐까---.
 
다음으로 금년 연극계에 있어서 흥미있는 사실의 하나로서는 상업극단의 최후견진이었던 東洋劇場의 大동요가 그것이다.
전 경영주 崔象德씨로부터 新館主 高世衡씨에게로 건물과 아울러 경영권이 양도되어 넘어가자, 그 아래 전속극단으로 되어있던 '靑春座' 또는 '豪華船'의 동요와 교란이 그것이었다.
우선 청춘좌의 대부였던 黃澈, 車紅女를 비롯하여 극작가 林仙圭,, 장치가 元雨田 등 제씨는 東劇을 사직하고 따로 분리되어 신극단 '阿郞'을 결성하였다. 물론 이들은 청춘좌와 호화선을 총망라한 강력 팀이었다.
그러므로 이같은 우수한 간부를 잃어버린 동양극장은 재래의 스타나 혹은 영화계의 인기 여배우를 불러들이는 동시에 작가진을 강화하고, 종래의 흥행 본위의 연극보다는 얼마간 수준이 높은 연극을 하자는데서부터 현상을 타개하려 했던 것이다.
사실 현재의 東劇이 이러한 그들의 당초의 방침대로 착착 운행하고 있음을 볼 때 비록 지금에 있어서 그들의 내일의 태도는 예측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임선규씨 작 <청춘극장>을 가지고 탄생공연을 가진 '아랑'이 연내나 혹은 내년 봄을 기하여 제일극장 무대를 고쳐 가지고 다시금 데뷰한다고 하니, 불원한 장래에 있어서 아랑과 동극은 동서로 나누어져 그야말로 연극대항을 하게 될 것이니 이 역시 단순히 관객의 하나로서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여간 흥미있는 일이 아니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신극단체로서는 협동예술좌를 비록하여 극연좌가 있고 낭만좌가 있으며 또 일방 흥행극으로서는 재래의 비속한 세계로부터 비약을 시험한 東劇과 아랑이 동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 여지껏 중앙에서는 공연은 가지지 않았을망정 소외 중각극적인 경향을 즐겨 채택하고 따라서 앞으로도 이러한 "신극이면서 재미있는 연극"을 하리라는 극단 '高協'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지껏 지방을 다니며 고협이 어떠한 업적을 남겨 놓았는지, 그것은 여기에 앉아서는 알수도 없는 일이며, 동시에 지방공연의 특수성이란 핸디캡을 고려할 때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문제는 다만 그들이 여하히 우리들 앞에 나타나며 또한 장래에 여하한 길을 밝아 갈는지가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미리 피차가 주의하고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즉 고협이 금후로도 지방공연만 지속하고,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우리에게 정당한 평가를 요구치 않는다면, 그렇다면 고협에게 대해서의 우리의 기대는 근본적으로 붕괴되는 동시에 결코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점이다. 극단 고협은 다행히 우수한 연기자와 지도자와 기술자를 많이 가졌다. 아랑헤 임선규씨가 단독으로 극장에 몰두하고 있듯, 이곳에는 朴英鎬씨가 열의에 불타 있으며, 연기자 진에는 朴昌煥, 朱仁圭를 비롯하여 金連實, 宋秋蓮, 盧載信 등 상당한 강력적인 팀 웍이 짜여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금년 일년간의 극단의 중요사는 대개 기록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여기에는 필자로서 가혹한 비판을 요구하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나는 끝까지 하나의 리포트로서 이 一文을 抄함으로써 책임을 다 하려 한 것이다.
끝으로 생각나는 것은 조선의 신극은 너무도 많은 숙제를 가진채, 또한 여지껏 이 많은 숙제중에서 얼마도 풀지 못한 채 여지껏 내려왔으며, 또한 이러한 서글픈 상태로서 질식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일의 신극이 극장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또는 돈이 없다고 덮어놓고 A형 혹은 B형의, 아니 그보다도 더 알수 없는 형형색색의 형상으로서의 변장을 하고 나선다면, 우리는 우리의 교양을 위해서라도 도저히 머리를 숙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신극에만 국한한 말은 아닐 것이다. 전 연극분야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엄염한 하나의 테제일 것이다.
매년 있는 恒例의 연극콩쿨이 우리들의 신극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권위있는 심사원을 배열하지 않으면 이 역시 우리의 흥미의 대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昭和 14년(1939)은 신극에 있어서나 흥행극에 있어서나 확실히 혁신의 년대였다. 개혁의 연대였다. 그러나 형식을 고쳤다고 반드시 그것이 좋으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극본을 들고, 어떠한 무대로 나서게 될지, 이것만이 오직 모든것의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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