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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평론 <朝鮮 신극운동의 현단계와 그 전망>
관리자 2007-11-30
東亞日報  1937.7.16~22 총 6회 연재
 
朝鮮 新劇운동의 현단계와 그 전망
---中間劇의 검토를 중심과제로        金永壽
 
(연재1회)
前言
   진정한 연극문화의 건실한 수립을 유일의 스탠더드로 내세우고 미력이나마 몇분의 공헌을 거듭하고 있는 양심적 新劇연구단체인 劇藝術연구회 이외에 우리는 기타 2-3의 명예 혹은 불명예스러운 극단의 분포를 당면하고 있다.
신극문화의 풍부한 유산을 상속 받지 못한 多難多忙한 현실에 직면한 우리로서는 장래 할 신극의 르네상스를 희구하며 촉진하려는 헌신적 의도하에서 침식된 혹은 침식의 비운을 초래하려는 신극진영의 모든 영역을 殺菌 옹호하기 위해 과감히 一文을 草하는 바이다.
지난 7월7일 저녁, 필자는 시내 府民館에서 흥행된 새 극단 '중앙무대'의 제2회 흥행을 다분의 노력과 필사적 인내를 경주해가며 최종막까지 무사히 보고났음을 우선 영광으로 여겨야 좋을까, 다행으로 돌려야 옳을까...나는 이제도 斷案에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해당 극단의 탄생을 지난 달 東京에서 신문의 보도로서 비로소 알았을 때 더구나 그 조직 성원의 태반이 필자와도 약간의 면식이 있는 현 흥행극단에서 쟁쟁한 명예를 자긍하고 있는 중추적 인물임을 알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건실한 성장 발전을 기원하였으며, 回를 따라 소기의 성과를 거듭하도록 희구하였음을 먼저 고백하여 마지 않는다.
여기에는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첫째, 그들이 재래 흥행극단에서 過犯한 오류를 스스로 비판하게 된 것과, 다음은 소위 <中間劇>이란 어느 때든지 필연적으로 문제화될 새로운 과제를 들고 나선 용기 때문이었다.
전자에는 다분의 경의를 표하였고 후자에는 넘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던 터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이번 그들의 제2회 흥행을 보고난 지금의 나로서는 騎士的 義憤을 억제치 못하는 나머지 스테이지에서 노출된 그들의 마비된 동심과, 한발 나아가서 소위 <중간극>이란 擬態(주: 거짓된 겉모양)가 숙명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만성적 賣春婦性을 지적 아니치 못할 곤경에 함몰하고 말았음을 해당 극단을 위하여 또는 내자신을 위하여 심히 괴롭게 여기는 바이다.
나는 바로 지금 위에서 마비된 동심과 만성적 매춘부성이란 문자를 기록했다. 더구나 이러한 문구를 기록함에 있어서 추호의 주저도 필요치 않았음을 附記하는 동시에 이것은 전폭적 흥행劇 또는 중간연극에 대한 필자의 검토 비판의 내용이 결과한 결론이며, 따라서 이 시론의 확충된 전제라는 것을 명언하여 둔다.
흥행 극단의 卑俗性으로부터 이탈을 감행하는 동시에 극예술의 제1 프린시플인 審美的 探究와 건전한 예술성과는 노골적으로 絶緣 내지 거부를 급급하고 있는 소위 <중간연극>의 문화사적 지위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중앙무대>의 출현은 우리 신극운동의 현단계에 있어서 필연적 萌芽에 기인하는 것이냐 혹은 새로운 하나의 신극분야의 잔루로서 우리는 용인할 수 있느냐----하는 본질적 문제를 討究闡明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논리상 순서일 것이다.
흥행극단은 근래에 이르러 부동적이었든 분포지역을 축소하는 한편, 노력을 집중화하고 고정자본의 운용과 극장소유의 특권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이론적 또는 실천적으로 진실한 신극운동의 제1선상으로부터 도태되려하든, 축적된 울분을 소탕하려기에 또는 기업적 의욕을 충족시키려기에 신경쇠약의 타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극운동의 웅대한 역사적 사명을 스스로 포기하고 단지 단말마적 이빨을 갈며 몸부림을 치기에 흥행극단의 모든 에너지는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차제에 있어서 극예술연구회, 조선연극협회, 靑春座, 중앙무대, 기타 東京학생예술座 등 근래에 보기 드물게 보는 각양각색의 극단을 생산하고 있는 우리 신극운동 主調의 역사적 시대적 구명을 시도하는 동시에 극단 '중앙무대'가 선언한 소위 <중간연극>이란 新양식에 대하여 본질적 검토를 勇斷함으로써 표면상 심히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듯한 現今 우리 극단의 內沈된 亞流를 일소하고 또한 이미 침식된 악질적 병균을 소독 제거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연재2회)
一, 영업극단의 분열과 그 시대적 성격
극단 '신건설'의 해산이후 진정한 신극의 生長발전을 위하여 단독 일로매진하고 있는 조직으로서 우리는 오늘의 劇예술연구회를 상식적으로 지적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와는 대조적인 저하된 선상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신극의 汚濁과 교란을 음모 감행하고 있는 흥행극단의 기형적 발전을 발견 혹은 인식하기에 우리의 두뇌는 그다지 피로치 않을 줄 안다.
이상 2종의 확연한 이데올로기를 표명하고 있는 별개의 그룹과 그룹사이에 중간연극이란 孤高의 聲을 지르고 나선 방황하는 사생아에 대하여 그 모태인 흥행극단 자체는 과연 여하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는가.
또한 이미 생산된 사생아를 오늘의 진보적 연극인은 어떠한 아량으로써 劇사상의 기록을 시험할 것인가.
따라서 현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朝鮮的 특수사정(문화적)은 어떠한 수단 방법으로써 유기된 사생아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사생아의 장래할 전도는 낙관이냐? 비관이냐?
이와같은 모든 질문과 懷疑는 흥행극단의 분열로부터 기인된 오늘의 우리 신극 영토내의 새로운 중심적 테제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우선 이야기의 순서상 흥행극단의 본질적 규명을 해보고 <중간연극>의 시대적 성격을 적발하기로 하자.
계급적인 또는 無統制的인 각양각색의 浮動的 관객을 절대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흥행극단의 숙명적으로 부여된 진로에는 그 진로의 동력으로부터 기인된 약점과 惑種의 强點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장점이란 그들의 무교양과 마비된 自意識을 대담히 노정하기에 자못 쟈유로움을 운위함이요, 단점이란 기업적 炯眼을 구비한 타산적 공리적인 자체의 필연적 계절적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林聖九, 金陶山一座 등이 제시하는 흥행극사를 구구히 인용할 필요도 없이 가까이 '청춘좌' 조직이전 흥행극단의 난립의 비극적상태를 一顧하면 명백히 그들의 숙명적 약점이 입즐될 것이며, 또한 청춘좌 이후의 분립된 소위 중간연극이란 기치를 들고 나선 극단 '중앙무대'의 결성이전의 동요를 일별하면 너무도 명백히 그들의 영속적 결함이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을 줄 안다.
흥행극단의 유일무이의 理想은 그들의 선언과 같이 상업적 영리적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상업적 융성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값싼 상품을 濫造하여 가급적 비싼 값으로 투매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며, 고객의 기호를 시급히 파악하여 계적절 수요에 응해서 복종적 공급을 나태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 또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우울이 잠재하였고 불안이 배태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관객의 눈이 값 싼 로맨티시즘에서 비로소 피로를 의식하였을 때 그들은 연쇄극이란 新 형식을 제공하여 생계를 도모하려 하였고, 그 역시 지지를 거부당하였을 때 그들은 또한 <幕間>이란 세기막적 무대를 분식하기에 노예적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일부의 진보적 관객층으로부터 축출되기 시작하며 막간의 위기가 예언되었을 때 그들은 온갖 파렴치와 기만을 최후로, 한동안 질식상태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흥행극단의 표면상 질식은 내용적으로 다대한 교육과 각성이 체득되었으리라고 호의로써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오늘의 흥행극단 스테이지에서 막간을 마이나스 하게 된 원인은 7년이나 그들로 하여금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은 우리 신극 운동자들의 간접적 공로를 그들도 시인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흥행극단은 고객의 부류를 따라, 계급을 따라, 기호를 따라, 신극 전반의 역사적 사명과는 절연을 선언하고, 몇번의 변절을 감행하며 수단 방법을 헤아리지 않고 여러차례 擬態를 용단하기에 조금도 주저치 않았음을 역사는 웅변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번 '중앙무대'로 하여금 <중간연극>이란 새로운 장르를 부여하기엔 너무도 양심이 허락치 않음을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나 흥행극단으로부터 분열 독립을 도모하고 실천하기에 4-5개조의 童心的선언을 공포한 용기만을 가급적 높게 평가하려는 아량은 영구히 아끼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제2의 흥행극단 '청춘좌'를 분기시킨, 근원적인 극단 '청춘좌'로부터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을 발견하기에 그다지 몽매치 않음을 심히 괴로워한다.
흥행극단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오류를 청산하고, 자력적으로 갱생을 도모하며 비약을 꾀하기전, 또는 우리의 순수한 신극운동이 기적적으로 참으로 기적적으로 건강한 모터를 중지하기 전, 흥행극단은 제2 제3의 분열의 고배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필연적 사실이 되고 말았다.
다음에 저들이 선언한 소위 <중간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규명을 가하기로 하자.
 
(연재3회)
二, 극단 '중앙무대'는 과연 중간극의 萌芽인가?
중앙무대측의 선언에 의하면,
"재래의 흥행극단에서 불순한 요소를 제거시키고 연구단체의 너무나 지나친 아카데미즘을 배격하는 중간연극"이 곧 그들의 중각연극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만약 불행히 그들의 이같은 선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대상에 실현된 구체적 실천이 중간연극의 일시적 존립이나마 위기의 함정으로 전락시키고 말게 된다면 또는 되었다면 이 책임은 누구에게로 전가될 것인가.
그래도 그들은 이론과 실천의 상위를 아직도 운운할 만용을 가질까.
흥행극도 아니며, 신극도 아닌 것을 하느냐, 흥행극도 하며 신극도 하느냐...등등의 질문은 이미 본지상에 徐恒錫씨로부터 제의된 바이다. 그러나 제2회 흥행을 경과한 오늘에 있어서 서씨의 질문에 대한 소기의 결정적 답안이 작성되었음은 누구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번 레퍼토리의 전부는 해당 극단의 선언과 동시에 공포된 그들의 수많은 각본중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불시로 채택한 레퍼토리로부터 오는 핸디캡을 만약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만 근거없는 주장이 될 것이며, 일층 더 극단자체의 불해명을 극한 애매한 정체를 스스로 폭로함에 편의를 도웁기에 불과할 것이다.
"연극성을 잃은 희곡과 희곡성을 잃은 연극은 모두 쩔둑바리다.
우리는 쩔둑바리的 미완성에서 연극 즉 희곡이란 완성의 길로 나간다"
                                                                  (중앙무대 선언 4항)
이와 같이 안일한 선언을 향락하며 그러나 실천의 가능을 무시한 무모한 행위를 지금에 있어서는 분개한 나머지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再言하자면 蔡萬植씨작 <예수나 안믿었다면>(전1막)은 창립당시로부터 채택된 레퍼토리의 하나이며 宋影씨는 그 극단 문예부 책임자중의 한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금번의 대본 전부는 그들의 선언을 실천화 하기에 그들이 의식적으로 공포한 대본진영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이 중심적 극본이 제시한 몇 개의 소위 <중간연극>으로서의 좌절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간단히 이유를 열거해보면
1. 흥행극단의 분열이 곧 새로운 장르를 형성할 수 없는 시대적 성격을 인식 못한 것.
2. 극본 채택에 비판적 의식적 智力이 결여된 것.
3. 흥행극의 질적 향상을 극작가에게만 혹은 극작가의 사회적 명성에만 의탁한 것.
4. 연출방식의 진보적 실험을 배격하고 흥행극의 세련된 卑俗性을 노출한 것.
5. 연기자들에게 이미 감염된 흥행극적 앱노멀한 연극신경이 아직껏 건강을 지속하고 있는 것. 등등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신극운동의 현단계에 있어서 우리는 <중간연극>으로 하여금 흥행극의 연장으로서 단안하며, 혹종의 지위를 양보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지금껏 선언문을 작성할 당시의 칭찬할 만한 양심이 의연히 존재한다면 그들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이상의 논술의 타당성을  시인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초래할 결과였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에 있어서 일시적 맹아의 의태를 연출한 소위 <중간연극>이란 자체의 자살적 행위를 弔하는 무모한 센티멘탈리즘을 포기하고, 신극의 건전한 성장을 위하여 정당한 코스를 개척, 지시하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의분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과연 <중간연극>이란 새로운 장르가 존립할 수 있느냐---하는 본질적 懷疑를 해명하기에 게을리할 수 없음을 자각한다.
 
(연재4회)
三, 소위 <중간연극>의 존립은 가능한가
신극다운 신극을 보여주었느냐---고 신극 진영에다 공격의 독화살을 쏜다 치더라도 또는 흥행극의 예술적 평가를 최고만점으로 끌어올리려고 아무리 현학적 이론을 전개한다손 치더라도, 신극은 신극으로서의, 흥행극은 흥행극으로서의, 각자의 엄연한 독립적 영토를 확보하고 있음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실천이 필연적으로 결과한 명예 혹은 불며예일 것이다.
<햄릿>을 안했다고, <파우스트>를 못했다고 우리의 신극운동이 지난 업적을 전적으로 부정할 논거가 성립할 수 없음은 너무도 상식적 정견일 것이며 동시에 <부활>을 하였다고, <춘향전>을 하였다고 흥행극의 질적 향상을 운위하기에는 그다지도 우리들의 예술적 평가眼과 裁斷이 불건강하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일시적 擬態로서나마 중간연극의 기치를 본 오늘의 명석한 관객은 이로 하여금 곧 새로운 하나의 신극의 분류로서 영접하기에는 판단을 허락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이제 우리 극단에는 중간연극의 존립이 불가능한가, 이하에 준비된 답안을 제공하기로 한다.
중간연극의 기구를 주성함에는 세가지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1. 흥행극단(국부적)의 일시적 자각을 계기로 한 분열적 遊離일 것이며,
2. 타락한 신극의 자살적 행위일 것이며,
3. 무소속 그룹의 기초적 공작일 것이다.
그러나 1의 방법은 이미 극단 '중앙무대'의 현실동태와 실천적 결과에 대한 필자의 검토가 있었으며, 따라서 흥행극단의 일시적 擬態만으로서는 중간연극의 고집을 지지하기엔 너무도 무모한 만용이라는 것은 일찍이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바이기에 다시 재론을 피하기로 한다.
그러면 다음의 2의 방법이 기대될 것인가?
극단 '신건설'의 비장한 종결은 극문화의 진보적 수립을 위한 나머지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최후적 기록으로 자체의 貞操를 위한 殉死일 것이다.
극예술연구회의 과거 7년간의 현실적 고투는 비타산적 비영리적 기록의 연속이었다.
저하된 혹은 기준이하의 대중을 규합하여 신극 ABC로부 교육적 출발을 그들은 부지런히 했다, 또는 하고 있다---는 관찰이 편견을 일소한 가장 양심적인 비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그들의 양심적인 무대가 급진적 야망에 장식되었을 때 일부의 局外者는 아카데미즘의 형성이라고까지 치명적 렛텔을 붙이려고까지 했다.
혹은 將來할 신극의 합리적 운영방침을 대상(혹은 관객일반)에 의거하려 한다는 선명을 공언했을 때, 혹자는 곧 신극의 질적 타락을 지적하는 등의 경솔한 단정과 가련한 추태가 횡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4-5천의 고정 관객을 포옹하게까지 이르게 되었고, 제2차나 혹은 제3차의 지지하던 공연회수를 증가시켜, 劇本難, 자본난, 극장난 등등의 모든 객관적 난관을 돌파하며, 월 1회 공연을 과감히 실천하고 있는 유일의 신극연구단체인 '극예술연구회'의 전도를 우려할 이유가 악직절 근원으로부터나마 생성할 수 있을까?
흥행극단의 강점이 고정자본에 있다면 (그러나 이것은 금일의 상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신극집단의 강점은 고정관객에 있는 것이다.
가령 신극의 低落을 잠시 가장해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신극 또는 신극의 일부가 분열되어 중간연극의 공작을 기초하리라고 가정해보자.
신극이 전폭적으로 저하되어 중간극으로 전환된다면 신극을 상실한 소위 <중간연극>의 존립은 그 자체로부터 벌써 애매하게 될 것이 아닌가.
A와 B란 가치기호가 있어야 A 플러스 B라는 또는 A 마이나스 B라는 수학 형식이 성립될 것이 아닌가.
신극의 엄연한 진영이 존재하고 그 진영의 활동이 계속하는 한편, 大資本과 대극장의 소유로 인하여 옹립되어 있는 흥행극의 집단적 노력이 넘쳐나는 객관적 연유로 말미암아 비로소 중간연극의 지위가 부여되는 것은 가까이 日本 내지의 극단의 동향을 보아도 알 것이다.
명예와 전통을 자긍하고 있는 歌舞伎의 흥행노력이 강화를 거듭하는 한편 村山知義의 제창을 중심으로 응결집중된 新協극단과 新宿 제일극장 혹은 新橋 연무장등의 대극장으로 진출하고 있는 '新築地극장'의 발랄한 활동이 현출됨으로써 井上正夫 水谷重子 일파의 중간연극이 혹종의 배타와 지위의 타당성을 향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또는 연극사적으로 신극 또는 흥행극의 발전과정을 달리하고 있는 日本내지에서만 상기할 수 있는 우리와 처지의 상위가 격심한 저들의 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오인해서는 못쓴다.
신극과 흥행극의 견고한 진영이 존립함으로써 중간연극의 맹아를 가능케함은 변증법적 발전과정일 것이며 양자의 활동이 계속하므로 중간극의 대두를 일시적이나마 상기할 수 없음은 우리의 특수 현실이 불허하는 아이로니컬한 현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신극의 변절 혹은 低落을 가상하므로서 또는 흥행극의 자각 혹은 비약을 전제함으로써 우리 극단의 새로운 하나의 장으로서 중간연극의 본질적 검토규명을 구구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사적 자각을 거듭하며 遂日的으로 역사적 사명을 실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일의 우리의 신극운동의 질적 타락을 또는 변절을 상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상식을 일탈한 독단이 아니면 안될 것이라는 것은 앞에 말한 것과 같다.
더구나 형극의 길을 걸으며 방대한 투쟁사를 쌓았고 또는 쌓으려는 우리의 진정한 신극 전반에 대한 왜곡적 해석과 악질적 단안은 역사적 또는 사회적 검토와 인식의 능력이 결여된 증좌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은 前述로써 이미 입증된 내용인 것이다.
신극의 질적 타락이 만일 가능하다면, 오늘의 진보된 관객은 그들로 하여금 死滅의 毒杯를 강요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닌가.
신극의 정조를 위한 殉死를 감행할지언정, 정조를 꺾고 主義를 變改하고 막 나설 신경의 마비를 노출한 불명예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나마 다행히 우리의 신극은 아직껏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중간연극의 기구를 조성하기 위해서 2의 방법으로써 가정한
"타락한 신극의 자살적 행위"라는 항목은 그 가능성의 결여를 웅변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남은 "무소속 그룹의 기초공작"이라는 3의 방법을 규명해보기로 하자.
또한 논의의 편의상 이 3의 방법이 방법론적 타당성을 가장 충족히 내포하고 있는 항목이라고 가설하자.
그러면 이 가설이 가설에서만 그치지 않을 이론적 근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필자는 곧 <할 수 없다!>는 부정적 결론을 시급히 용단하며 이어 이 결론에 대한 구체적 논거를 제시하기로 한다.
 
(연재5회)
四, <무소속 그룹의 기초 공작> 시비
신극 수립을 오로지 설계하던 초창기에 있어서 우리의 신극운동자들은 당시 발랄한 이론과 실천을 전개하고 있던 일본내지의 진보적 신극 영토로부터 學理的 또는 기술적 양분을 섭취하기에 몰두 하였었다.
그것은 진정한 급진적 욕망이 희구하는 당연한 탐구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극으로 하여금 일본내지의 신극의 발전과정과는, 의의와는, 시대적 해석을 구별할 줄 알았다.
극단 '신건설'의 해산은 이 시대적 해석의 빈곤으로부터 초래된, 비극적 종결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우리의 중간연극으로 하여금 신극의 초창기가 취한 일부 방편과 같이, 일본내지의 현상을 전제로 하고 또는 중심으로 하고 생각하기에는, 쌍방의 극단동태와 그의 사회적 경제적 상위가 너무도 명백함은 막을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그 <상위>란 무엇인가?
일본내지에는 歌舞伎(주: 가부키)라는 전통적 고유연극의 一形態로서 봉건적 자본주의 사회의 유품이 존재하고 있다. 신극은 이 기존의 유품을 강력적 항쟁으로 거부해가며 성장의 방도를 개척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유일의 전통적 연극문화로서, 그들 자본가 자체내에서 배태되고 생산되고 성장한 歌舞伎라는 고전을 일본내지 신극은 일찍이 당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歌舞伎는 소위 신극보다는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우위였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였고 사회적으로 광범하였고, 정치적으로 무풍지대였던 것이다. 그러자 新思潮의 수입으로부터 기인한 진보적 연극이 점차로 대두하여 플롤레타리아트를 규합하는 일방, 아메리카적 재즈의 아류를 직수입하여 오페라 혹은 레뷰 등의 신양식으로서 자본계급 또는 소시민층을 유혹하려는 소위 본격적 흥행극단이 우후죽순격으로 봉기되었을 때 歌舞伎의 위기가 예언 되었으며 따라서 전통으 자랑하던 고전은 가장 큰 객관적 고민을 경험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井上正夫가 대담히 <중간연극>이라는 새 표찰을 걸고 나선 직접적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고전적 유품의 위기를 예측한 나머지 흥행극단에 대한 의식적 합류였으며 신극전반에 대한 무의식 저항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들의 경리상, 기업적 수학적 타산이 선행하였으며 합리적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또는 그들의 '타산의 성공'을 우리는 통찰할 능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기모노'에서 권태를 느낄 때 브라우스와 스커트를 구하였고, 게다에서 염증을 느꼈을 때 하이힐을 매입한 것은 시대적 감각이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끊임없는 호기심의 연속인 것이다.
歌舞伎의 고정적 보수적 레퍼토리에서 바야흐로 권태를 느끼려는 관객을, 또는 재즈 분위기에서 환멸을 느낀 관객을, 또한 신극으로부터 안가의 향락을 기대못한 관객을, <중간극>이란 새로운 산하로 집중하기에 井上일파의 선견이 냉엄한 것이었고, 준립의 타당성을 시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내지의 중간연극의 궐기는 만네리즘에 침몰된 歌舞伎의 지지를 포기하며 동시에 신극과 흥행극에서 호의와 자극을 상실한 양적으로 우세한 관객일반으로 하여금 유일의 대상으로 삼자는 타산이, 그들의 합리적 강력적 선견의 전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井上正夫의 <중간연극>은 스스로 경리적, 기업적, 합리성으로부터 오는 리드미컬한 존립의 개가를 고창할 수 있었음은 중언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그들의 엄연한 연극사에 몽매하고, 따라서 朝鮮的 툭수사정에 무지한 나머지, 오늘의 우리 극단에 새로운 하나의 회색의 기폭을 들고나선 <중간연극>이란 과연 얼마나한 시대적 적응성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의 신극은 신극 스스로가 굴종적 대중을 규학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오, 반대로 자각한 대중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신극을 배양, 지지, 옹호하고 있음에 특권이 있는 것이다.
 
(연재6회)
四, <무소속 그룹의 기초공작>(續)
동시에 우리의 흥행극은 유랑시대로부터 이제야 바야흐로 중앙집권시대로 전향하여 고정자본의 운전하에서 비로소 발랄한 시장을 공개한 것은 그다지 멀지않은 역사에 속한다.
고전을 못가진 금일의 우리의 관객은 고전을 안치할 박물관을 설계하기전에 장래할 새로운 제너레이션에게 계승할 건실한 연극문화의 수립을 기혹한 것은 이미 과거에 속하는 사실이다.
재즈와 차단되고 레뷰와 몰교섭하였던 오늘의 우리들의 대중은 흥행극의 환멸을 의식하기에는 아직도 충족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흥행극으로서의 자긍이 있고 동시에 신극으로서의 진영을 강화 아니치 못할 시대적 각오와 타협이 개재하여 있는 것이다.
공연 또는 흥행이 결과하고 있는 수학적 보고로써 고찰할 수 있는 거의 일정 불변의 관객으로 하여금, 純, 不純의 2종의 강력적 기구가 명확히 분활하여 대각선상에다 각각 대오를 편성하고 있는 금일에 있어서 産出한 또는 산출하려는 <중간연극>이란 사생아는 장차 어디로 구원의 SOS를 타전할 것인가?
그러나 신극 일반의 정화를 위해 유기된 사생아를 시급히 고아원으로 인도할 아량을 필자는 아끼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자포자기의 나머지 자살을 도모할 비극적 종결을 미리 弔喪할 수 있는 박애적 정신이 남아있음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상으로서 <중간연극>은 변증법적으로 불가능을 극하며, 부인 또는 부결되고 말았다. 이것은 중간연극 자체가 누구보다도 명확히 시인하리라고 빋으며 結言을 옮기려 한다.
 
結言
우리의 신극운동의 현단계가 직면하고 있는 중심적 테제는 흥행극에 대한 도전도 아니며 또한 소위 중간연극의 대두로부터 기인할 제2의 고민도 결코 아닌 것은 이미 명백하여졌다.
우리의 신극은 명예로운 과거를 자부해도 좋다. 빈곤은 수치가 아니다.
우리의 흥행극은 얼마든지 상품의 투매를 활발히 해도 좋다. 역사는 시장의 성쇠로 하여금 반복을 되풀이 하기에 분초를 다투고 있다.
오직 '시간'이 해결권을 장악하고 있는 제문제의 프로세스를 우리는 연극사적으로 또는 문화사적으로 추단하기에 그다지 곤란을 의식 못하는 이상, 일시적 혼탁을 보이고 있는 듯한 오늘의 무대로 하여금 비관할 이유는 추호도 업다 !
극장의 소율르 향수치 못한 오늘의 우리의 신극은 순간이나마 과거의 불굴의 에스프리를 상실할 이유를 발견치 못할 것이다.
협착한 한 칸 방에서 신극의 萌芽가 약속되고 발육한 아일랜드의 연극사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흥행극의 발호는 언제나 신극부대에 도래하고야 말 숙명적 시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중은 언제나 低價한 享樂에서 마취를 계속하리라고 당당히 예언할 수 있을까.
대중의 연극적 評眼이 遂日的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低下에 저하를 거듭하리라고만 그 누가 단언할 것인가.
"연극을 공부하려면 극장으로 가라!"고 절규한 '아~차~'교수로 하여금, 汚濁의 절정에 승화된 사이비 극장만을 소유하고 있는 현금의 우리로서는, 일시적 역행을 감행 아니치 못할 悲運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비운은 곧 신극의 비운은 아니다!
신극을 마이나쓰한 악질적 극단의 자멸적 비운일 것이다!
우리는 장래할 명일의 신극을 위하여 강화된 흥행극단의 도전과 몇몇의 擬態인 사이비 극단의 출현 내지 횡행을 하나의 자극제로 취사함으로써 바야흐로 본격적 비약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라고 믿는다.                                                 --끝--
 
 
 
 
 
*김영수 평론 <月評을 誅함>
*김영수 평론 <나의 문단 타개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