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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기-김유미 부부 시카고 40년
관리자 2007-04-26
*이 글은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한국일보에 실린 것입니다.(1999, 12,31, 금요일자)
시카고는 작가 김유미씨 부부에겐 '미국의 고향' 입니다.
1963년 처음 시카고에 도착한 김유미씨가 안영기씨를 만나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아 결혼 시킨 곳입니다. 36년간 교육자의 길과 문학의 길을 함께 걸었던 마음의 땅입니다.
엔지니어인 남편 안영기씨에겐 1958년 유학부터 은퇴까지 41년간 삶의 터전입니다.
은퇴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사가는 부부 이야기를 한국일보에서 '송년특집'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관리자)
 
코리안 아메리칸의 삶

안영기-김유미씨 부부 시카고 40년

 
1999년이 저물어 가는 가을, 안영기 김유미씨 부부는 40년 시카고 생활을 정리하는 이삿짐을 쌌다. 이삿짐을 싼다기 보다는 40년간 함께 살아온 물건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안영기씨 부부는 은퇴를 하고, 제2의 고향 시카고를 떠나 새로운 문화권이 기다리고 있는 캘리포니아주로  떠났다. 로스앤젤스에서 1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신흥도시 Temecula를 은퇴지, 새 안식처로 정했다.
 
 
안영기 김유미씨 부부의 40년 시카고 생활은 50년대와 60년대 유학생으로 미국에 정착, 코리안 아메리칸이 된 올드 타이머들이 살아온 미국생활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제 이들 세대가 서서히 은퇴를 시작하고 있다. 70년대 이민물결의 앞선 세대로 코리안 아메리칸 컴뮤니티의 창설 그룹이기도 한 유학세대는 이민역사의 활동무대서 사라져가고 있다.
천년이 저물고 세기가 저무는 역사적 1999년 저녁에 이들 부부를 만나서 그들이 살아 온 미국 생활의 이야기를 들었다. 은퇴와 이주를 동시에 하는 이들 부부의 시카고 삶은 한해와 한세기가 사라지는 시대적 상징과도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카고의 무대에서 떠나는 이들 부부는 무엇을 꿈꾸며 살아왔고, 이제 무엇을 남기고 시카고를 떠나는 것일까. 그들의 삶, 가치관, 살아온 역정 시카고 코리안 아메리칸의 한 모습이고, 그것은 이민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 조광동 기자
 
"은퇴하고 사막도시로 갑니다"
 
<<안영기씨의 41년의 삶>>
안영기씨는 21세때인 1958년 5월에 미국을 왔다. 꼭 41년 전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후 인디애나주 에반스빌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에반스빌 대학에서 미국 공부의 기반을 마련한 안영기씨는 퍼듀 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당시 퍼듀대학에는 한국 유학생이 30여명 있었고, 그 가운데 국가에서 유학을 보내는  육사 출신들이 많았다. 공부를 끝낸 안영기씨는 시카고로 왔다. 당시만 해도 시민권이 없는 외국 유학생 출신이 일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제가 잡(job)을 못 잡았을 때 차별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 나라 사람을 쓰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주는 것만도 고마웠어요" 직장을 얻기위해 고심했던 60년대 초 20대초반 안영기씨의 생각이었다.
안영기씨가 처음으로 취직한 곳은 Pyle National Company였다. 한달 봉급이 470불. 다른 미국인 졸업생들보다는 월급이 한참 아래였다.
 
시골 교회에 들어가 무작정 결혼 주례 부탁
 
이럴 때쯤 시카고에서 김유미씨를 만났다. 퍼듀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김유미씨의 형부를 알게 된 것이 인연이었다. 1963년 11월에 만나서 다음해 7월에 결혼을 했다.
시카고 북서부 교외 지역을 지나다가 아담한 교회를 발견하고 무작정 걸어 들어가 목사님에게 결혼 주례를 해달라고 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자동차가 없었던 이들 신혼부부는 기차를 타고 위스컨신 델로 신혼여행을 갔다.
취업을 한지 5년만에 영주권을 받은 안영기씨는 직장을 바꾸었다.
영주권이 나오자 다른 미국 직원들 수준으로 월급을 올려 주겠다고 했지만 스코기에 있는 텔리타입 회사로로 옮겼다. 월급이 470불에서 780불이 되면서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일즈로 이사를 한 안영기씨 부부는 여기서 두 딸, 크리스틴과 엘리자베스를 얻었다.
71년도에 한국으로 귀국, KIST에 들어 갔으나 1년이 못 되어 다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돌아 오면서 안영기씨는 미국에 뿌리를 내릴 생각을 했다. 1981년 모토롤라로 직장을 옮긴 안영기씨는 18년간 근무한 후 1999년 7월 62세로 엔지니어링 매니저(Engineering Manager)로 은퇴를 했다.
"엔지니어 때까지는 차별 안 당하고 제일 좋은 직책을 맡았어요. 그러나 그 이상을 올라 갈 수가 없었어요. 이사나 부사장이 되는 것부터는 기술이 아니라 컬쳐(문화)입니다. 그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 저한테는 없었어요. 저는 이 문화의 벽을 못 뚫었어요. 뚫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이 벽을 못 뚫었어요. 저는 이것을 차별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제 한계였죠"
 
"이민 1세는 1단계 로켓...궤도에 올려주면 2세가 달을 향해 가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자지자신을 알아야지요. 미국인들 서클 깊숙이 들어 갈 수 있는 문화적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알아야지요. 얼마 전 펜타곤에서 일했던 중국인이 TV에서 인터뷰하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대단히 능력이 있었던 사람인데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어요. 기자가 여기에 대해 불만이 없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이민자들이 이 사회에 들어와서 사는게 로켓이 달에 올라가는 걸로 생각합니다. 1세인 나는 1단계인 부스터 로켓이지요. 궤도에 올려놔 주면 2세가 계속 달을 향해 가고, 3세가 달 착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이 제  생각과 아주 같았어요."
 
"저는 문화의 벽을 못 뚫었어요. 차별이 아니라 저의 한계라고 생각"
 
이렇게 안영기씨는 매사에 철저할 정도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을 가졌다. 이런 안영기씨의 철학은 삶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밤 늦게 부인에게 전화가 와도 누구냐고 묻지 않고 바꾸어 주고, 부인에게 오는 편지를 절대로 뜯어보지 않는다. 부인이나 아이들 일기장이 책상에 펼쳐져 있어도 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안영기씨는 이런 철학을 부인에게도 요구했다.
교사였던 부인 김유미씨가 식데이(sick day: 아플 때 쉴수 있는 날)를 이용해서 학교를 안가면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몹시 반대했다.
"왜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느냐는 거지요. 저는 밤새도록 글을 쓰고 몸이 피곤할 경우 당연히 내가 가질 수 있는 권리인 식데이를 찾아 가지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생각이었어요. 하루는 아침부터 싸우기가 싫어서 학교 간다고 나온 후 안영기씨가 출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식데이를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막상 집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하니 내가 치사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식데이를 안하고 학교로 출근했지요. 이런 사람하고 살았으니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원칙에 철저한 아버지 "아이들 일기장도 몰래 읽으면 안된다"
 
안영기씨의 철저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피 머신이 처음 나왔을 때 부인이 안영기씨 직장에서 복사 좀 해 달라고 부탁하면 언성을 높이면서 "왜 개인적인 것을 회사에서 하려고 하느냐?"면서 "그런 양심으로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핀잔을 주기도 했다. 통조림통을 부시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환경 규정을 철저히 따르는 안영기씨는 집에서 맥주병이나 김치병, 통조림 깡통을 물로 부시고, 깡통에 붙은 종이 레벨을 물에 불려서 뗀 후, 별도로 마련된 환경정화통에 버린다. 우리들 후세가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구를 아끼고 환경을 깨끗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큰 딸 크리스틴이 한국에 가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였다. 퇴근을 하면서 크리스틴이 종이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지않고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의아해서 묻는 어머니에게 딸은 "일회용 컵을 사용하는 거니까 한번 쓰고 버리면 안되잖아요. 내일 또 쓰려고요" 라고 대답했다.
 
피켓 들고 한국의 반독재 규탄 시위..."제 양식을 표현했을 뿐"
 
스스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안영기씨에게는 이렇게 남다른 비범한 삶이 있었다.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도 그 중에 하나였다. 1958년에 한국을 떠나서 미국 서 공부하고 주류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어떻게 피켓을 들고 한국의 반독재 규탄 시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안영기씨는 "저는 앞장서는 사람은 못되고 옳지 않은 것에 제 자신의 양식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부사장으로 승진 못한 것을 차별이라고 생각지 않을 만큼 차별이란 말을 정직하게 사용하기를 원하는 안영기씨는 두 딸의 아버지로 여자를 차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딸들을 최대한 인격적으로 대한 안영기씨의 생활은 계란 아침 식사에서도 나타났다.
 
아이들의 선택 존중...개성적으로 키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일요일이면 안영기씨는 가족들에게 계란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큰 딸은 스크랩블 에그(scramble egg)를 주문하고, 작은 아이는 프라이드 에그(fried egg)를 원했다. 그럴 때 엄마는 "귀찮게 서로 다르게 먹으려고 하니, 둘 중에 하나를 택해서 식구가 같이 먹으면 편하고 시간도 절약될 텐데" 하고 말했다. 이런 말을 안영기씨는 "엉터리"라고 지적했다. 아이들 마다 먹고 싶은 게 서로 다른데, 왜 똑 같은 것을 먹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개성적으로 키운 관계로 두 딸은 미국사회 깊숙이 들어가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적극성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큰 딸은 샴페인 일리노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서 앤더슨에서 일하다가 뉴욕대학교 MBA를 졸업하고 현재 A T Kearny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작은 딸은 퍼듀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앤젤스 타임스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지에서 광고사원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두 사위가 미국인..."누구든 같은 문화로 편한 상대와 결혼해야"
 
두 딸 모두 미국인 남편을 만난 것에 아쉬움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질문을 했다.
---두 딸 모두가 미국 사위를 본 것에 유감스러운 것이 없나요?
"배우자의 종족이 같다고해서 행복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미국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한국인이지만 미국 문화에 더 편합니다. 미국인이나 한국인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자신의 문화에 편하게 느끼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말을 가르쳤나요?
"한국학교에도 보내고 한국에 어학연수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한국말 그 자체보다는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주는데 더 노력을 했어요. 이 사회에 살면서 한국식으로 사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살 아이들이니 이 사회에 융합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두 아이들 모두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안선생님은 미국 친구가 얼마나 됩니까?
"미국 친구가 별로 없어요. 직장친구는 모두 미국친구지만 집에 초청할 만큼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없어요. 제가 동양사람이 없는 시골에 살았다면 미국 친구를 사귀었겠지요. 그것도 제 한계지요."
40년을 살아 온 시카고에서 은퇴,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안영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은퇴한 것이 너무 좋습니다. 직장에서 엔지니어로 대우를 받으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일했고, 또 여러개의 특허도 받았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안하고 수확해 놓은 것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골프 치고 정원 가꾸고... 앞으로 언어학원에 가서 일본말도 좀 배우고 싶고, 기계 고치는 것을 배워서 동네에서 핸디맨 서비스를 하는 조그만 가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는 시빌 마인드(시민 봉사정신)가 없어서인지 남는 시간을 봉사할 생각은 별로 없어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주어진 환경에서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말로 안영기씨는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자신에게 맞추어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산 안영기씨는 이제 출근하지 않어서 좋고, 정해진 시간에 일을 마쳐야하는 압박감이 없는 것이 너무나 자유스럽고 즐겁다면서 다음 인생의 장을 살기 위해 시카고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딸들이 아버지 은퇴를 축하하고, 옛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큰 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두 가지 '피의 유산'...작가 아버지와 교육자 어머니
 
<<김유미씨의 36년의 삶>>
김유미씨는 22세 때인 1963년에 시카고로 왔다.
당시 형부 부부가 오로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카고와 인연을 맺었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마치고 꿈에 부풀어 미국에 온 김유미씨는 안영기씨를 만나면서 공부 대신에 가정주부가 되는 길을 택했다.
공부를 포기하고 두 딸의 어머니가 된 김유미씨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생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딸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내셔널 에듀케이션 칼리지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김유미씨는 교사의 길을 택했다. Bateman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유미씨는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김유미씨에게는 부모로부터 받은 두 가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작가였던 아버지 김영수씨로부터 받은 글쓰는 욕구와, 방송국 어린이시간 노래담당 교사였던 어머니 조금자씨로부터 받은 가르치는 즐거움이었다.
학교에서 천진한 아이들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김유미씨는 너무나 즐거웠으나, 글을 쓰고 싶은 것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밤이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낮엔 학교...밤엔 부엌에서 글쓰기..."밥 태우고...밤 새우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어떤 때는 밤을 새우고 글을 쓰다가 허겁지겁 학교로 출근할 때도 있었어요. 학교에 갔다 와서 글을 쓰다가 남편이 올 시간이 지나도록 밥을 못해서 당황할 때도 있었고, 밥을 앉혀놓고 깜빡해서 태울때도 있었지요"
이렇게 밤에 글을 써서 김유미씨는 1975년에 첫 작품집 <보이지 않는 그물>을 출간했다. 첫 소설집을 내면서 글 쓰는 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학교 갔다오면 으례 책상 앞에 앉게 되고, 글쓰는 것이 일이 되었다. 글에 빠져 가면서 김유미씨는 늘 시간에 쫓겼다.
이렇게 글을 쓰던 김유미씨에게 새로운 도전이 생겼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정신을 가르치는 한국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김유미씨는 일리노이 한국학교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김유미씨의 한국학교에 대한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한국말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한국정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김유미씨의 생각이었다.
 
"이민사회의 교육문제 심각...아이들을 외톨이 만든다"
 
"우리 이민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2세의 한국교육입니다. 한국교육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아이들을 아웃사이더(국외자)로 만들지 않나 하는 걱정입니다. 한국학교, 한국교회, 한국 친구만으로 살다보니 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도 미국사회의 중심에서 지도적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요. 미국사회의 중심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 사회의 2등 시민을 만들고 있다는 우려가 들 때가 있어요. 한국말을 아주 잘하지만 민족적으로 열등의식을 가진다면 한국교육을 잘못 시킨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김유미씨는 아이들에게 한국말보다는 한국인의 긍지를 심는데 주력했다. 이런 교육 탓인지 아이들이 한국말은 잘못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긍지가 남다르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름에 라비니아 팍 연주회를 갈 때면 김밥을 싸 가자고 졸라요. 집에서는 젓가락질도 안하다가 미국인들이 신기한듯 들여다보면 과시라도 하듯 젓가락을 사용하면서 자랑을 해요. 저는 미국에서 한인들끼리만 왕래하고 사는 것을 반대해요. 한국을 선양하려면 2세들이 미국사회에 들어가 지도자가 될 때 더욱 높아지지 않겠어요. 조금만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인종차별이라고 흥분하는 것은 약자의 열등의식 같아요. 이런 멘터리티(사고방식)로 아이들을 키우면 영원한 마이너리티로 만듭니다"
 
미국인들에게 열등의식 갖지 않도록 가정교육
 
김유미씨는 자신이 부모에게 욕을 한마디도 듣지않고 자란 것처럼 아이들에게 욕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길렀다. 부모에게 받은 교육방법을 아이들에게 전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차이니즈라고 놀린다고 하기에 나는 차이니즈가 아니라 코리언이라로 말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코리아는 아름다운 나라고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설명했어요. 이런 대화를 오래 하다보니 아이들은 코리안이 백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가 되었어요. 저는 미국 살면서 미국인들에게 열등의식보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꼭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그렇게 키운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부모의 이런 유산을 아이들에게 전해준것 같아요"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 김유미씨는 최근 딸아이 집에서 있었던 파티 이야기를 했다.
"집에서 회사 사람들 40명쯤 초청하는 파티를 했어요. 그런데 저는 우연히 부엌에 있는 초청장을 보고 놀랐어요. 딸아이는 초청장을 보내면서 집에 올 때 다른 선물을 가져오지 말고 25불 안팎의 베이비 선물을 가져 오라고 적었어요. 에이즈(aids)에 걸린 베이비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가져오라는 것이었어요"
에이즈 베이비를 도우려는 딸아이 모습은 어머니에게는 감동이었다.
아이들이 편식을 하려고 하면 부엌에다 비아프라의 굶어 죽은 아이들 사진을 붙여놓고 불행한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반독재 운동을 했을 때 아이들이 왜 그런 걸 하느냐고 물으면, 옳다고 믿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 것이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고 있다.
 
군사정부 비판 글 썼다고 한국비자 거부 당하기도
 
글 쓰는 일을 하면서 자녀교육에 잠시 열중했던 김유미씨의 열정은 한국정치로 또 다른 도전을 받았다.
"미국 시민으로 사는 저는 한국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큰 일을 당했을 때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광주사건이 났을 때 저는 그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1980년대의 조국은 아픔이었고, 이 아픔은 김유미씨 열정의 상당부분을 빼앗아 갔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김유미씨에게는 반정부 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이 즈음에 김유미씨는 <뜨거운 가슴으로>를 출간했다. 이 수필집은 삶의 이야기를 쓴 것이지만 많은 부분이 한국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김유미씨가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하면 거부되기도 했다.
 
대표작 <억새바람> MBC-TV 방영...한국 영어교사들 지도
 
한국 학교와 조국 민주화운동에 발을 디뎠지만, 김유미씨가 가장 몰두하는 것은 글 쓰는 일이었다. 여기서 결실된 대표작이 <억새바람>이었다. 코리안 아메리칸의 삶의 애환과  아픔을 그린 <억새바람>은 MBC-TV에서 연속방송극으로 만들면서 김유미씨의 작가적 명성을 크게 했다. 해외 한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억새바람>은 김유미씨가 본격적으로 글쓰는 일을 시작케 했다. 학교를 조기 은퇴하는 것이 김유미씨에게는 결정하기 어려운 큰 어려움이었다.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가르치는 것을 그만둔다는 생각이 한동안 퇴직을 망설이게 했으나 1996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글 쓰는 일에 전념, 김유미씨는 9권의 책을 썼다. 이와 함께 한국의 영어교육을 위해 여러 권의 영어책을 썼다.
영어교재를 쓴 김유미씨는 매년 방학이 되면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영어교사들에게 영어 교육법을 지도하는 강의를 하기 위해 한국을 간다.
2000년 새해가 밝기가 무섭게 김유미씨는 겨울방학을 한 한국의 영어교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1개월간 한국을 갈 예정이다.
 
인생은 장편소설..."지금부터 세 번째 챕터, 굿바이 인사는 말아요"
 
남편 안영기씨를 따라 시카고를 떠나는 김유미씨는 자신은 시카고을 떠나도 은퇴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저는 인생이 책과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생의 장편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22년까지가 한국에서 산 한 챕터(chapter), 그리고 시카고의 37년이 두 번째 챕터였어요. 저는 이제 세 번째 챕터를 시작하고 있어요. 한 장이 아무리 화려하고 재미있어도 그것이 끝나야 다음 장이 시작되지 않겠어요.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어도 전 챕터에서 나온 인물이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계속 나오고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겠지요. 스토리가 여기서 끝나는게 아녜요. 저는 결코 굿바이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삶을 돌아보면서 김유미씨는 후회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삶이 고맙고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서 살아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는 게 슬프진 않아요. 앞으로 남은 삶, 그레이스풀(우아한) 하게 늙어 가는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시간을 내서 봉사도 좀 하고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끝----
배우 추석양의 기억들
인터뷰...MBC 드라마 <억새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