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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공연을 축하하며 (김유미)
관리자 2007-09-21
'한국연극 재발견' 첫번째 무대
국립극단 제178회 공연 <血脈>
1998년 6월12일(금)~21일(일) 팸플릿 p11
 
<혈맥> 공연을 축하하며 
 
아버지.
몇 년전 우연한 기회에 <혈맥> 원본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책, 누렇게 변해버린 페이지를 한 장 또 한 장 넘길 때마다 행여 삭아버린 종이가 바스라질까 봐 가슴도 팔도 떨렸습니다.
저는 그 책 뒷머리에 있는 아버지의 글, "나의 과거"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그토록이나 가난했는지, 동경 유학을 교비생으로 가신 건지, 연극사를 가르치는 일본 교수에게 감히 조선인 학생이 "그따위로 강의하려거든 집어쳐라"고 항의하여 졸업논문에 "우" 를 받아놓고서도 쫒겨나셨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얼마나 연극을 사랑하셨는지, 얼마나 순수문학과 생계를 위한 글쓰기 작업 사이에서 괴로워하셨는지......
"생활의 빈곤은 문학에서만 오지 않았다. 언젠가는 축지소극장에서 하우프트만의 직장(織匠)이라는 연극을 초일에 보러갔다가 어찌도 감격했던지 돌아오는 길에 15일간 표를 한꺼번에 산 적 있다. 그때문에 그 달에는 한달 내내 점심을 먹지 못했고, 방세도 못 치러서 주인 오바상에게 살이 직직 내리도록 시달렸었다."
아버지,
연극 때문에 한 달 내내 점심을 굶으셨다는 대묵이야말로 아버지, '김영수'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엇에든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빠져드는 그런 분이시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활화산 같다고.
"연출할 때 보면 열정적으로 자신을 잊고 도취된다. 그러기에 연기자들이 감동을 받는다."
김동원 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막 올리는 첫날, 아버지가 무대감독 대신 머리에 수건을 질건 동여매고 징을 뺏아들고 분장실로 뛰어다니신 적도 있다지요?
"작품을 쓸 때 미리 흥행을 생각해야 하고 소도구, 의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건 작가에게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같은 막대한 불행과 빈궁 가운데서 희곡을 썼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나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어느 정도 극단과 타협을 하면서 동시에 작품의 문학성을 고집하자. 이러한 디램마에서 나는 내 작품에 대해 불만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요행 "혈맥"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다."
아버지,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던 50,60년대, 가난한 시대의 작가였던 아버지.
문학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늘 고민하셨던 아버지.
"흥행이나 인기에 관계없이 쓰고 싶은 작품을 1년에 하나고 10년에 하나고 무게 있고 값있는 작품을 쓸 생각이다."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그러실 수 없었지요.
"작품이 없구나. 드라마를 많이 쓰다보니 남길만한 작품이 별로 없구나. 이제부터라도 정말 쓰고 싶은 작품, 몇 개는 쓰고 가야하는데......"
세상 떠나시기 몇 년 전, 한숨에 섞어 독백하듯 하시던 그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 한국 연극재발견 작업으로, 정부수립후 제 1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혈맥>을 올립니다. 지금 생존해 계시다면 연습장에 매일  나타나셔서 순진한 어린애처럼 흥분해 얼마나 좋아하실까.
아버지.
임영웅선생님 옆에 앉아 연기자들이 열렬하게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디에선가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시며 "굿, 굿" 소리를 지르실 것만 같아 자꾸만 눈앞이 흐려왔어요. 아버지처럼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왠지 오래오래 그 주변에 서성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기뻐하세요.
털보가 거북이가 깡통영감이 원팔이 원칠이 옥매, 복순이가 모두 모두 살아났어요. 아름다운 장충동 숲속에서 살아났어요. 아버지는 결코 외롭지 않으세요. 오늘 이 자리에 <혈맥>이 살아있어요.
 
이 연극에 관여된 모든 분들에게 머리 숙여 큰절을 올립니다.
 
                                                      김유미
                                                      김영수 둘째 딸
                                                      1998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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